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我/좋은글모심

너의 길을 만들어라

너의 길을 만들어라

 

 

지난 주말 ‘제주올레’를 걸었다. 죽었던 제주가 올레 덕분에 다시 산다는 말이 있을 만큼 그것은 제주의 명물이 됐다. 본래 ‘올레’란 자기 집 마당에서 마을 어귀까지 이르는 골목길을 이른다. 이것을 전 시사저널 편집장인 서명숙씨가 ‘놀멍 쉬멍 걸으멍(놀며 쉬며 걸으며) 천천히 걷는 길’로 재정의해 2007년 9월 제주도 동쪽 시흥초등학교에서 출발하는 제1코스를 시작으로 지금까지 14코스의 제주올레를 연 것이다. 그녀는 숨은 길을 찾아냈고 끊어진 길을 이어냈으며 사라진 길을 되살렸고 없던 길을 새로 냈다.

서명숙씨는 본래 제주도 서귀포 출신이다. 어린 시절엔 갑갑하게만 여겨지던 그곳을 얼른 벗어나 휘황한 불빛과 높은 빌딩이 즐비한 서울로 가기를 고대했었다. 그녀는 고향 제주에서 산 것의 갑절이 넘는 30년 이상을 서울에서 살았다. 대학을 마치고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다니던 직장에서 편집장 자리까지 차고 앉아 봤다. 하지만 그새 그녀의 몸과 맘은 만신창이, 삭정이가 돼 있었다. 그녀는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스스로 백수가 된 후 성 야고보가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걷기 시작했고 1000년 넘게 수많은 가톨릭 신자가 순례했으며 작가 파울로 코엘료의 삶을 바꿔놓았다는 도보 여행자들의 성지길, ‘산티아고 길’ 800㎞를 자신의 치유를 위해 걸었다. 2006년 9월, 그녀 나이 50세 생일을 한 달여 앞둔 때였다.

산티아고 길의 막바지 여정에서 그녀는 영국인 길동무한테 이런 말을 들었다. “이제 너는 너의 나라로 돌아가서 너의 카미노(길)를 만들어라. 나는 나의 카미노를 만들 테니.” 이 한마디가 그녀를 감전시켰다. 그리고 저지르게 했다. “산티아고 길이 성 야고보의 히스토리(history)가 숨쉬는 길이라면 나는 설문대할망과 그녀의 후손인 해녀들의 허스토리(herstory)가 담긴 길을 만들겠노라”고. 그래서 태어난 것이 바로 지금 나와 너, 우리가 함께 걷는 제주올레다.

제주올레는 차로 30~40분이면 갈 거리를 하루 종일 걷는 느리고 더딘 길이다. 하지만 거기엔 살아 있는 숨이 있고 넘실대는 생명이 있으며 가슴 벅찬 감동이 있다. 승리와 성공의 견인차처럼 둔갑한 빠름이 결코 대신할 수 없고, 결국 따라잡을 수도 없는 것이 실은 느림이며 그것이야말로 진정 생명의 수호자임을 온몸으로 느끼게 해주는 것. 그것이 바로 제주올레의 진면목이다. 본래 생명은 느린 것이다. 느린 것이 삶을 잉태한다. 그리고 그 느림 속에서 삶은 숙성된다. 이것을 스스로 깨닫게 해 주는 것. 그것이 제주올레를 걸어야 할 진짜 이유다.

걸으면서 보고 느끼는 것을 차 타고 가면서는 결코 할 수 없다. 걸으면서 땅을 딛고 가는 것과 자동차를 타고 허공에 떠가는 것은 하늘과 땅만큼의 격차가 있다. 차를 타고 휙휙 지나가며 호텔과 골프장에만 처박혀서는 결코 알 수 없다. 걸어 봐야 느끼고 헤매 봐야 맛볼 수 있는 것이다. ‘빨리빨리’ 허둥대며 바삐 돌아가는 이들에겐 숨겨진 비밀을 ‘간세다리(게으름뱅이)’는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대개 빠름은 더 많은 소유를 추구한다. 반면에 느림은 더 많은 내려놓음을 가져온다. 가지려 하고 소유하려 하는 사람에게 느림은 만들어지지 않는다. 내려놓을 때만 우리는 느려질 수 있다. 그리고 그 느려진 사람에게 새 길이 보인다. 빨리 가려고만 하려는 사람은 이미 난 길 위에만 서 있다. 하지만 그는 결코 알지 못한다. 세상에는 또 다른 길이 있다는 것을.

삶에 지쳤던 한 여인이 스스로의 생명력을 되찾기 위한 몸부림 속에 만들어낸 제주올레. 그 더디고 느린 길 위를 걸을 때 바람과 파도가 내게 일러줬다. 삶이란 자기만의 길을 내는 것이라고. 포기하지 않고 좌절하지 않고 비록 느리고 더딜지라도 말이다.   

정진홍 논설위원(중앙일보)<ATOMBIT@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