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아편전쟁과 해독제 고려홍삼 - 역사 속 인삼이야기 #10
지난시간에 고려인삼이 중국 최대 약재 도시인 장수전을 거쳐 광저우로 들어간 루트를 확인해보며 중국을 거쳐 서양으로 수출되는 과정을 살펴봤는데요. 지난시간에 이어 오늘의 역사 속 <심이야기>도 광저우에서 어떻게 거래되었으며 중국 아편전쟁이 고려인삼 판매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청나라의 일구통상(一口通商) 정책과 광저우
광둥 성은 해안선이 약 4300㎞로 중국 전 해안선의 23.8%를 차지합니다. 해안선이 길고 굴곡이 심한 편이어서 선박이 정박하기 좋은 항구가 많습니다. 광저우는 양쯔(揚子) 강과 황허(黃河) 강과 함께 중국의 3대강이라 일컫는 주장(珠江) 강의 하류에 위치하며, 홍콩과 마카오와 함께 주장 강 삼각주 지대라고 부르는데요. 영국풍 모습이 완연한 홍콩과 지중해풍의 포르투갈 자취가 남아 있는 마카오는 광저우와 함께 바다를 통해 서양과 동양을 잇는 해양 실크로드의 출발지였습니다.
광둥 성의 성도(省都) 광저우는 일찍부터 태국, 필리핀 제도, 술루 제도(Sulu Archipelago), 셀레베스 군도, 말라카 군도, 싱가포르, 보르네오섬, 자바, 수마트라, 말레이시아, 베트남, 캄보디아 등과 교역하였고 그곳의 상인도 광둥 지역으로 와서 교역하였습니다.
중국과 동남아시아의 무역이 전개되면서 중국과 서양 여러 나라가 교역할 수 있는 기회도 자연스럽게 생겨났습니다. 포르투갈 상인이 이미 명나라 때 중국에 진출했고, 스페인은 동남아시아의 그들 식민지에서 중국 상인들과 교역하였습니다. 명말 이래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 덴마크, 스웨덴, 이탈리아, 프러시아, 미국 상인들도 중국에 와서 교역하기 시작했는데요. 광둥에서는 일본과의 무역도 진행되었습니다.
그런데 청나라는 1757년 서양과의 무역항을 광저우항으로 제한하고 서양과의 무역은 13행(行)이라는 특정 상인에게만 독점적으로 허가했는데요. ‘하나의 항구에서만 통상을 허가한다’는 청나라의 ‘일구통상(一口通商)’ 정책은 1842년 아편 전쟁의 결과로 체결된 난징조약으로 5개 항구가 개항되면서 깨지게 되었습니다. 중국과 서양의 무역은 이를 기점으로 성격이 크게 달라지는데요. 그래서 1757년부터 1841년까지 중국의 대서양무역을 광둥무역체제라고 합니다.
광저우를 통해 서양으로 수출된 고려 인삼
광둥무역체제 시기 외국 상인은 직접 중국 내의 시장에서 물건을 사고팔 수 없었는데요. 외국 상인들이 물건을 사기 위해서는 반드시 양행상인(洋行商人)의 손을 거쳐야 했습니다. 이들은 대외무역을 독점하는 일종의 특권상인이었습니다. 이들이 광둥 13행(行) 상인인데 흔히 13행이라고 불렸습니다. 13행이라 해서 13개의 가문이 이끌었던 것은 아니었는데요. 특권을 가진 집안의 수는 항시 변동하였기 때문입니다.
13행은 상인 길드식 조합인 공행(公行)을 만들어 활동하였습니다. 외국 상인은 주장 강변 황푸고항(黃埔古港)에 늘어선 광둥 13행 상관(商館)을 벗어날 수 없었는데요. 청나라는 상관을 설치함으로써 외국인의 거류지와 무역의 범위를 제한하는 동시에 외국 상인을 통제는 ‘일구통상(一口通商) 정책’의 표상을 만들었습니다.
광둥 13행은 서편에서 동편으로 덴마크관(Danish Factory), 스페인관(Spanish Factory), 프랑스관(French Factory), 장관행(章官行, Chunqua’s Hong), 미국관(American Factory), 보순관(寶順館, Paou-shun Factory), 제국관(Imperial Factory), 스웨덴행(Swedish Factory), 구영국관(Old English Factory), 혼합관(混合館, 미국-영국, Chow-Chow Factory), 신영국관(New English Factory), 네덜란드관(Dutch Factory), 소계관(小溪館, Creek Factory) 등이었습니다. 또한 상관을 남북으로 종단하는 3개의 도로가 있었고, 13행 상관과 중국인 거주 지역을 구분하기 위해 13행관 북쪽으로 도로를 만들었는데 이것이 광둥 13행가입니다.
중국에서 외국으로 수출되는 상품은 일단 광저우에 집결된 이후 13행의 손을 통해 외국 상인에게 넘어갔습니다. 거래량은 영국이 가장 많았고 미국, 네덜란드, 덴마크, 프랑스, 스웨덴, 스페인, 프러시아, 이탈리아, 기타 국가 순이었습니다.
수출품은 차(茶)가 가장 많았고, 생사와 견직물이 그 다음이었는데요. 수입품은 모직물, 면화, 아편, 백은(白銀) 등이 주종을 이루었습니다. 특히 광저우를 통해 유입된 백은이 중국으로 유입된 양의 80%를 차지할 만큼 대단한 비중을 차지했다고 합니다.
베트남의 민망 황제가 고려 인삼을 광저우를 통해 얻고 있었듯 서양인들도 광저우에서 인삼을 얻었습니다. 광저우에서 팔린 홍삼은 무역량으로 보면 크지 않았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중국 사람들로부터 들었던 고려 홍삼의 명성은 서양 사람에게도 충분한 관심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신비의 영약 홍삼을 그들의 나라로 가지고 가서 최고의 권력자인 국왕과 귀족들에게 선물하기 위해 적지 않은 양이 교역되었을 것입니다.
중국 아편전쟁 당시 조선의 홍삼 수출량이 급증한 이유는 무엇일까?
광둥무역체제를 통해 중국은 서양과의 무역에서 흑자를 기록했는데요. 무역 적자가 계속 불어나자 영국은 이를 메우기 위해 동인도산 아편을 들여와 팔게 되었습니다. 아편의 수입량이 늘어나자 이제는 역으로 중국의 은이 영국 등 서양으로 유출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중국 무역 적자의 폭은 1830년대 현격하게 늘어났습니다. 중국은 아편의 단속을 강행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 아편 전쟁을 초래하였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이 있습니다. 중국에 아편 수입이 늘어나는 시기에 조선의 홍삼 수출도 급증했다는 것인데요. 1841년 2만 근으로 늘어난 홍삼의 공식 수출량이 1841년에는 2배인 4만 근까지 증가하였습니다. 이유는 조선의 홍삼이 아편 해독에 뛰어난 효능이 있다는 중국 사람들의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홍삼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이 폭발적 수요를 유발했던 것입니다.
개성 출신 김택영이 지은 『중경지』에는 “아편으로 병든 청나라 사람들이 인삼을 약으로 쓴다. 이런 까닭에 우리나라 인삼을 얻어 아주 귀중히 여기며 복용한다.”고 하였습니다. 실제로 조선의 홍삼 수출량은 아래 그래프에서 보는 바와 같이 1847년과 1851년에 정점을 찍었습니다.
중국 시장에서의 조선 홍삼의 명성은 광저우에서 수출품으로서 서양으로 퍼져 나갔고, 동시에 아편이 수입되는 그곳에서 다시 아편 해독의 최고 약재로 명성을 떨쳤던 것입니다.
오늘은 중국의 아편전쟁이 고려인삼 판매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살펴봤는데요. 중국인들이 아편전쟁 훨씬 이전부터 고려인삼을 영험한 약효를 지닌 약재로 믿긴했지만 아편전쟁을 통해서 그 믿음이 더욱 확고해진 것 같습니다. 다음시간 역사 속 인삼 이야기에서는 중국시장에 미국인삼이 진출하면서 고려인삼에 판매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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