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땐 아이란 ‘황금잔’ 생긴다
장동건·고소영씨의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가운데)의 주례로 2일 결혼식[에이엠엔터테인먼트 제공] | |
톱스타 장동건·고소영(38)씨의 결혼식이 2일 오후 5시 서울 장충동 신라호텔에서 열렸다. 비공개로 열린 이날 결혼식에서 이어령(76·본지 고문) 전 문화부 장관이 주례를, 영화배우 박중훈(44)씨가 사회를 맡았다. 이 전 장관은 장씨가 주연한 영화 ‘더 워리어스 웨이’(올가을 한·미 동시 개봉 예정)의 연출을 맡은 이승무 감독 아버지로 주례를 서게 됐다. 이 전 장관은 새 삶을 시작하는 장동건·고소영씨를 축하하며 우리 시대의 숙제 중 하나인 ‘저출산 문제’를 언급해 눈길을 끌었다. 결혼과 출산, 가족의 의미를 강조했다. 다음은 주례사의 주요 내용.
◆스타는 대중의 꿈=연예인은 (대중의) 행복을 대신해 주고, 때로는 손에 닿을 수 없는 꿈을 직접 만져 볼 수 있게 한다. 오늘 그 별 중에서도 가장 큰 두 별이 하나가 되어 그 빛이 배로 밝아졌다. 두 스타의 결혼식은 많은 이야기를 젊은이들 가슴속에 심어줄 것이다. 결혼은 꼭 해야만 하는가. 결혼을 하면 아이를 가져야만 하는가. 독신 생활자가 늘고 저출산 시대를 맞고 있는 가족붕괴 시대에 오늘 이 결혼식은 전국의 미혼자들에게 “그렇다”는 명백한 대답을 내려 줄 것이다. 영화는 활동사진에서 입체영화로 발전해 갔지만 결혼은 거꾸로 천연색 시네마스코프로 시작해 흑백 무성영화로 끝나는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젊음의 현란한 색채는 하나둘 사라지고 수입은 반 토막 나고 자유롭던 생활은 가정이라는 굴레를 쓴다고 생각한다. 늙은 부부에게는 흑백 무성영화의 침묵만이 흐른다는 것이다.
◆장동건에게 묻는다=신랑이 영화인이니 묻겠다. 정말 그런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오늘 이 자리에 서 있지 않았을 거다. 결혼을 총천연색 영화라고 생각하니까 상실의 역사라는 말이 나오는 거다. 옛날 로마시대의 이야기처럼 결혼을 도둑맞는 상실이라고 생각하고 시작하면 그것은 영화의 발전사보다 더 화려하고 웅장한 방향으로 펼쳐지게 될 것이다.
이야기는 이렇다. 어느 날 제사장의 집에 도둑이 들었다. “무엇을 훔쳐갔는가”라는 황제의 말에 제사장은 “여러 벌의 은수저”라고 대답했다. 제사장은 희색이 가득했다. 도둑이 딴 집에서 훔친 황금 잔을 모르고 은수저 있던 자리에 놓고 갔던 것이다. 결혼은 그런 것이다. 결혼을 하면 자신이 갖고 있는 것을 잃게 된다. 혼자 살던 때의 자유와 수입, 그리고 자기 시간을 잃게 된다. 그 대신 자기에게 없던 황금 잔 하나가 들어오게 된다. 평생을 함께 사는 반려자 말이다.
◆아이라는 ‘황금 잔’=결혼을 하면 아이들도 생겨난다. 도둑맞은 시간과 자유의 자리에 계속 증식하는 황금 잔이 번쩍인다. 그런데 이 황금 잔을 혹으로 생각하는 여성이 늘고 있다. “현재의 출생률 패턴이 2대만 더 계속되면 이탈리아 아이들의 5분의 3이 형제자매란 말, 삼촌과 외삼촌 그리고 고모와 이모란 말을 모르고 지낼 것”이라는 인구통계학자의 글이 생각난다. 결코 남의 일이라고 할 수 없다.
◆고소영에게 묻는다=신부에게도 묻겠다. 아이가 혹인가. 애를 낳는 것이 정말 몸을 망가뜨리는 것인가. 대답을 기다릴 필요가 없다. 한국 최고의 미모와 매력을 지닌 스타가 아이를 낳아 우리를 기쁘게 할 날이 멀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아이가 태어난다고 하지만 사실은 어머니·아버지도 함께 태어나게 되는 것이다.
인간은 아들·딸로 3분의 1을 살고, 남편·아내로 3분의 1을 살고, 나머지 3분의 1은 아버지·어머니로 산다. 이 세 조각을 다 맞춰야 온전한 모양의 그림이 된다. 한국말 가운데 살림이란 말 이상으로 아름다운 말이 있을까. 일상의 반복을 일깨워 ‘살려내는 것’ 그것이 바로 ‘살림’이다. 결혼생활은 곧 ‘죽임’의 반대어인 ‘살림’이다.
인용= 중앙일보 박정호 기자(2010, 5,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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