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나리
조선 초기엔 김치로 사랑받아
“처갓집에 또 세배 가요.”
설날이 지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대부분 처갓집에 세배는 다녀왔을 것이다. 하지만 미나리를 핑계로 한 번 더 다녀와야 할 것 같다. 속담에 ‘처갓집 세배는 미나리강회 먹을 때나 간다’는 말이 있다. 얼핏 처갓집을 무시하는 말처럼 들릴 수 있겠지만 핵심은 봄철 미나리가 그만큼 맛있다는 것이다. 설날이 막 지났을 뿐 아직은 한겨울인데 무슨 봄 타령이냐고 물을 수 있겠다. 하지만 입춘이 지나면 이미 봄이 시작됐다고 본 것이니 지금이 바로 세배를 핑계로 처갓집에 미나리 먹으러 갈 때다.
자연산 미나리는 이즈음이 최고로, 날씨가 풀리기 전 얼음구멍을 뚫고 캐어낸 미나리야말로 진짜 별미라고 여겼다. 조선 영조 4년(1728년) 김천택이 우리나라의 시조를 엮어 편찬한 청구영언(靑丘永言)에 봄 미나리의 진가를 느낄 수 있는 시 한 구절이 실려 있다.
‘겨울날 따스한 햇볕을 임 계신데 비추고자/봄 미나리 살진 맛을 임에게 드리고자/임이야 무엇이 없으랴마는 못 다 드리어 안타까워하노라.’
사랑하는 임께 뭐든지 가져다 드리고 싶은데 그중에서도 살진 봄 미나리를 으뜸으로 꼽고 있다. 미나리가 계절을 앞서 알리는 전령사이며 봄철 입맛을 살리는 별미였던 것이다. 사실 봄 미나리는 다른 채소에서는 맛보기 쉽지 않은 독특한 향기와 풍미가 있어 입맛 없을 때 식욕을 되살리는 데 좋다. 특히 비타민 B군이 풍부하기 때문에 춘곤증을 없애는 데도 좋다고 하니까 이래저래 미나리는 봄철이 제격이다.
그래서 “아무리 맛 좋은 남원의 미나리라도 여름 것은 먹을 것이 못 된다”는 말까지 생겼다. 전북 남원은 미나리가 좋기로 예전부터 명성을 떨쳤다. 일제강점기의 문인 최영년이 해동죽지(海東竹枝)를 쓰면서 팔도진미를 소개했는데 남원 미나리를 제일 앞에 소개했다. 줄기가 꽉 차고 향기가 뛰어난 것이 순나물도 남원 미나리 맛에는 미치지 못하다고 했다. 순나물은 보통 나물이 아니다. 중국 진나라 때 장한(張翰)이 농어회와 순나물 맛을 못 잊어 벼슬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갔다는 고사에 나오는 채소다.
성종 19년(1488년) 명나라 사신으로 조선을 다녀간 동월(董越)이 쓴 조선부(朝鮮賦)라는 글에는 ‘한양과 개성에서는 집집마다 모두 작은 연못에 미나리를 심는다’는 기록이 있다.
사신으로 조선에 왔던 중국인의 눈에는 집집마다 미나리를 키우는 것이 이국적이고 신기해 보였던 모양이다. 조선에서는 왜 이렇게 미나리를 많이 키웠을까.
그것은 미나리가 중요한 채소이면서도 충성과 학문의 상징이었기 때문이다. 도교 경전인 열자(列子)에 미나리를 키우는 농부가 세상에서 미나리가 가장 맛있는 줄 알고 임금님께 바쳤다는 이야기와 함께 겨울철 햇볕의 따스함만을 아는 농부가 비단옷과 털가죽 옷을 입은 부자에게 양지에서 햇볕 쬐기를 권했다는 고사가 나온다. 이는 앞서 소개한 청구영언 시조의 소재가 됐다. 흔한 채소였음에도 이를 소중히 여긴 농부가 진상을 한 이 고사로 인해 미나리는 충성을 표상하게 됐다.
또 공자는 시경(詩經)을 인용해 인재를 발굴하는 것을 미나리를 뜯는 것에 비유했다. 이로 말미암아 우리 선조들은 자식이 열심히 공부해서 훌륭한 인재로 커주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미나리를 심었던 것이다.
<음식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