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밑에 돌아보는 이순신 리더십
한명기의 한중일 삼국지 중앙일보 입력 2021.12.31
불 밝힌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있는 이순신 장군 동상에서 새해에 대한 희망을 찾아본다. [중앙포토]
“지난번 경을 파직시켜 죄를 처벌하게 한 것은 사람들의 생각이 좋지 못했기 때문인데 끝내는 오늘 패전의 치욕을 불렀으니 무슨 말을 할 것인가. 지금 상중(喪中)에 있는 경을 특별히 일으켜 백의(白衣)에서 발탁하여 충청·전라·경상도의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에 임명하노라. 경이 도착하는 날 먼저 사람들을 불러 다독이고 흩어진 자들을 찾아내고 해영(海營)을 만들어 적을 누를 형세를 이뤄 군성(軍聲)을 진동시키면 이미 흩어진 민심을 다시 편안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1597년 7월, 선조가 백의종군한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하면서 내렸던 교서다. 교서를 내리기 며칠 전, 원균(元均)이 지휘한 조선 수군은 칠천량(漆川梁) 해전에서 일본 수군에 참패했다. 조선 수군은 거의 궤멸할 정도의 타격을 입었고 일본군은 이제 마음 놓고 서진(西進)하여 전라도는 물론 서해를 유린할 수 있게 됐다. 불과 몇 달 전 자신의 명령을 어겼다는 죄목으로 이순신을 처형하려 했던 선조는 상황이 다급해지자 이순신에게 사과하는 제스처를 취하며 수군을 재건해 줄 것을 간청했다. 이순신은 왜 하루아침에 죄를 뒤집어쓰고 죽음 직전까지 내몰렸다가 끝내는 백의종군의 치욕을 겪어야 했을까.
일본의 전쟁 구상 단박에 깨뜨려
1592년 4월 13일 부산에 상륙한 이후 일본군은 승승장구했다. 같은 해 5월 2일 서울에 입성한 일본군은 6월 16일 평양까지 점령했다. 선조와 조선 조정은 의주까지 내몰린다. 일본군 선봉장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는 평양에 입성한 직후 선조에게 서신을 보낸다. “우리 수군 10만여 명이 서해를 통해 올 것인데 대왕께서는 이제 어디로 가시렵니까.” 고니시는 일본 함대가 곧 병력과 물자를 싣고 서해로 올라와 의주까지 공격할 것임을 예고하면서 선조를 조롱했다.
고니시의 예언과 기대는 실현되지 못했다. 이순신 때문이었다. 같은 해 7월 이순신의 조선 수군이 한산도에서 일본 수군을 대파하면서 일본의 전쟁 구상은 뒤틀려 버리고 만다. 남해에서 서해로 이어지는 해로가 차단되면서 평양에 있던 고니시 부대는 심각한 위기를 맞게 된다. 당장 혹심한 겨울 추위가 다가오는데 방한복을 비롯한 물자 보급이 여의치 않았다. 따뜻한 규슈(九州) 출신 병사들이 대부분이었던 고니시 부대는 기한(飢寒)에 떨 수밖에 없었다. 평양에서 멀지 않은 의주에 선조와 조선 조정이 있었지만 고니시군은 공격할 엄두를 낼 수 없었다.
1593년 1월, 제독 이여송(李如松)이 이끄는 명군이 평양을 공격하여 대승을 거둔다. 고니시 부대는 비참한 몰골로 퇴각했고, 두만강까지 북상했던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군단도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전세는 역전됐다.
이여송의 명군이 승리할 수 있었던 배경에도 이순신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만일 일본 수군이 서해로 진입했더라면 명군이 들어오기도 전에 조선이 무너졌을 가능성이 높다. 또 이순신의 활약으로 전라도와 서해가 보전됐기에 명군에게 보급할 군량 등 각종 물자도 수송할 수 있었다.
감격한 선조는 이순신을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한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두 사람 사이에는 갈등이 싹트기 시작한다. 그 씨앗은 명군에 의해 뿌려졌다.
왜군과 강화협상 강요한 명나라
1593년 1월, 이여송군은 서울로 진격하다가 벽제(碧蹄)에서 일본군에 참패한다. 그런데 벽제 패전 이후 명군 지휘부는 일본군과의 전투를 포기한다. 패전에서 비롯된 인명 손실, 전쟁 장기화에 따른 전비 부담 증가, 대국으로서 조선에 할 만큼 했다는 인식 등을 반영한 조처였다. 명군 지휘부는 일본군과 강화 협상을 통해 전쟁을 끝내겠다고 선언한 뒤 조선도 자신들의 방침에 따르라고 강요했다.
조선은 원수(怨讐) 일본과의 협상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반발했지만, 명군 총사령관 송응창(宋應昌)은 조선군에게 전투 중지령까지 내린다. 적지 않은 조선군 지휘관들이 허락 없이 일본군을 공격하거나 공격하려 했다는 이유로 명군 지휘부에 붙잡혀가 곤장을 맞았다. 일부 명군 지휘관은 조선군의 공격을 우려하여 후퇴하는 일본군을 에스코트하기도 했다.
선조는 “빨리 결전을 벌여 일본군을 나라 밖으로 몰아내 달라”고 명군 지휘부에 호소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육군 전력이 미약하여 명군에게 기댈 수밖에 없던 조선은 고민에 빠진다. 명군이 사실상 전투를 포기하자 선조는 수군에 손을 내밀 수밖에 없었다. 연전연승을 거두고 한산도를 거점으로 바다를 지배하고 있는 이순신에 대한 기대가 한층 높아졌다. 1593년 2월, 선조는 이순신에게 “적이 후퇴하는 길목으로 급히 나아가 일본군을 몰살시키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당시 일본 수군은 이순신과의 교전 자체를 피하고 있었다. 이순신 함대는 일본 수군이 주둔한 해역을 들락거리며 그들을 끌어내려 했지만 여의치 않았다. 더욱이 1594년 4월, 고니시는 명군 지휘부에 조선 수군이 자신들을 공격하는 것을 금지시켜 달라고 요구했다.
명군이 싸움을 포기하고 수군으로부터도 결전 소식이 전해지지 않자 미묘한 상황이 빚어진다. 선조는 이순신이 고의로 싸움을 피하고 있다고 의심하기 시작했다. 거기에 신료들 사이의 당쟁이 기름을 부었다. 1594년 이래 조정에서는 이순신과 원균 사이의 알력 문제, 두 장수에 대한 평가 문제를 놓고 논란이 빚어진다. 대체로 남인들이 이순신을 높이 평가했던 데 비해 선조와 북인, 그리고 서인들은 이순신에 대해 몹시 비판적이었다.
일본 간첩 요시라(要時羅)가 “1597년 초 가토 기요마사가 재침을 위해 조선으로 향할 것”이라는 정보를 흘리자 선조는 그의 반간계(反間計)를 덥석 물었다. 선조는 당장 이순신에게 가토를 요격하여 붙잡으라고 명령했지만, 정보의 진위를 의심했던 이순신은 움직이지 않는다. 가토가 실제로 울산에 상륙하자 격노한 선조는 이순신을 잡아들인다. 일본군은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조선의 장성(長城)’을 무너뜨리는 데 성공했다.
복귀한 이순신은 1597년 9월, 명량해전에서 승리를 거둠으로써 일본 수군의 서해 진입을 다시 좌절시킨다. 그리고 1598년 11월, 패주하는 일본군을 추격하다가 노량해전에서 순국한다.
임진왜란 시기 이순신은 조선의 영웅을 넘어 동아시아의 영웅이었다. 그의 빛나는 활약 덕분에 동아시아의 기존 질서가 유지될 수 있었다. 일본은 애초부터 패권국 명을 정복하겠다고 공언했다. 만약 일본 수군이 서해로 진입했다면 산동반도나 발해만을 통해 북경과 천진 등 명의 심장부를 직접 공격할 수도 있었다. 실제로 왜란 발생 직후 명은 천진·산동·여순 등 북경 인접 지역의 해방(海防)부터 강화했다. 일찍부터 왜구의 침략에 시달렸던 명은 일본군이 이들 지역에 접근하는 것을 몹시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순신이 일본 수군의 서진을 원천 봉쇄하면서 명의 우려는 해소됐다. 명이 1592년 조선에 육군을 보내면서도 수군을 파견하지 않은 데는 까닭이 있었다. 하지만 명은 1597년 조선 수군이 칠천량에서 참패했다는 소식을 접한 이후 바짝 긴장한다. 부랴부랴 대책 회의를 열어 진린(陳璘) 등이 이끄는 수군 함대를 조선에 파견한다.
‘수군이 강한 조선’ 명성 심어줘
이순신의 활약을 계기로 17세기 이후 조선은 ‘수군이 강한 나라’로 부각되었다. 명·청 교체기 명과 후금이 조선의 향배에 신경을 곤두세웠던 배경에는 ‘수군 문제’도 자리 잡고 있었다. 1628년 조선에 왔던 명 사신 강왈광(姜曰廣)은 “조선인들이 배를 조종하는 것이 풍우(風雨)처럼 빠른데 그들이 만약 후금에 넘어간다면 명 본토가 위험해진다”고 경고했다. 1631년 후금의 홍타이지는 “조선 수군이 명 수군보다 뛰어나다”며 전함과 수군을 빌려 달라고 강청한 바 있다.
이순신의 위업은 19세기 후반 이래 일본인들에 의해 더욱 강조됐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 직접 참전했고 해군대학교 교장을 지낸 사토 데쓰타로(佐藤鐵太郞·1866∼1942)는 이순신을 고매한 인격과 창의적인 천재성에서 영국의 허레이쇼 넬슨(Horatio Nelson·1758∼1805)을 능가하는 ‘절세의 명장’으로 추앙한 바 있다.
일본인도 감복시킨 이순신의 ‘고매한 인격’의 핵심은 어떤 것일까. 무엇보다 군인이자 공직자로서 그가 보여준 책임감을 강조하고 싶다. 선조와 고위 신료들의 과오 때문에 죽음 직전까지 내몰리고 백의종군의 치욕을 겪었음에도 이순신은 이렇다 할 내색 없이 불세출의 책임감을 발휘하여 다시 나라를 구했다. 미·중 패권경쟁은 날로 거칠어지는데 이렇다 할 정치적 리더십은 보이지 않고 국론 분열이 더욱 심각해지고 있는 2021년의 마지막 날, 이순신의 리더십이 새삼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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