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我/좋은글모심

결단의 순간

선택의 시간

 

#멀쩡히 잘 다니던 직장을 그만둘 수 있는 건 어지간한 깜냥이 아니면 안 된다. 지난 1992년 당시도 가장 잘 나가는 회사였던 미국 IBM을 박차고 나오는 선택한 건 한마디 때문이었다. “차세대, 차차세대를 만들자.” 지금은 일선에서 물러난 삼성전기 박종우 전 사장의 얘기다. 그는 미국서 받던 돈의 절반도 안 되는 월급봉투를 받고 사무실에 야전침대를 놓고 먹고 자며 반도체 개발을 했다. 해외에서 공부하다 반도체 산업을 일궈보자는 말에 귀국해 반도체 개발에 나선 이들은 수두룩했다. 이건희 회장이 직접 설득했다고 알려진 황창규 전 사장도 그랬다. 그렇게 하나둘, ‘어벤저스’급 인재들이 모였고, 삼성은 세계 반도체 시장의 한 축으로 자리 잡게 됐다.

 

지난 14일 도쿄에서 열린 일본 최대 반도체 박람회인 세미콘재팬에 전시된 테슬라 모델3. 김현예 특파원

 

#2019년 3월 일본. 당시 게이오대 교수였던 구로다 타다히로(黒田忠広)에게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새로운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는 얘기였다. 일본에서도 반도체 연구로는 손에 꼽히는 구로다 교수에게 온 건 이적 제안. 대만의 반도체 파운드리(위탁생산) 회사인 TSMC가 도쿄대와 손잡고 차세대 반도체 기술을 연구하기로 했는데 합류해달라는 거였다. 그리고 5개월 뒤, 그는 도쿄대로 자리를 옮겼다.

 

『2030 반도체 지정학』을 쓴 오타 야스히코(太田泰彦)는 이 일을 일본 반도체 산업의 상징적 장면으로 꼽았다. 이후 일본은 변화기를 맞았다. 구마모토(熊本)현에 TSMC 공장이 들어서기 시작했고, 일본 대표기업 8곳이 뭉쳐 만든 반도체 회사 라피더스가 생겨났다. 라피더스는 최근 미국 IBM, 유럽 최대 반도체 연구소와도 손잡았다.

 

기업이 홀로 사람을 불러모아 기회를 노린 것이 옛 우리의 모습이었다면 일본은 사람과 기업, 정치·외교까지 모두 모인 형태로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반도체 시장을 주물렀던 옛 영화를 되찾기 위해서다. 지난 14일 도쿄 빅사이트에서 열린 반도체 박람회인 ‘세미콘재팬’에 의외의 인물이 깜짝 등장했다.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일본 총리다. 46년 만에 처음 있는 일로, 총리는 이렇게 강조했다. “공격적인 국내 투자 확대를 지원하겠다.” 말하자면 전력투구인 셈이다. 박람회장 한가운데엔 분해한 테슬라의 모델3가 전시됐다. 다양한 반도체 없이는 앞으론 산업생태계가 돌아가지 않는다는 위기감인 셈이다.

 

우리는 어떤가. 미국이 경제안보를 앞세워 삼성과 TSMC 생산기지를 자국으로 불러들일 때, 일본이 대만과 손잡고 대표 기업을 모아 ‘드림팀’을 꾸릴 때, 우리 정부는 그저 먼 산을 바라볼 뿐이다. 선택의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다.

김현예 도쿄 특파원/ 중앙일보 도쿄 특파원 hyk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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