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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농업과과학

멘델레예프의 주기율표

멘델레예프의 주기율표

 
한국화학연구원 항암제연구센터
조성윤
 

대한 화학회로부터, 귀중한 책 한권을 선물로 받은 적이 있다.  전공이 화학이면서도, 화학자의 인생의 이면에 대해서는 지금껏 모르고 지나쳐 왔다.  오히려 물리학자인 아인슈타인의 화려한 명성과 천재성이 귀에 익다.  그러한 면에서, 이 책은 읽는 나로 하여금 화학자로서 지녀야할 중요한 덕목들을 가르쳐 준 책이기도 하다.  더욱 흥미로 왔던 사실은 그가 유기 화학자였으며, 대학에서 제자들을 위하여 유기화학을 강의하고, 그에 맞는 책을 집필했다는 점이다.  한편으로는, 화학에 끼친 그의 공헌을 너무나 모르고 지나쳐왔다는 생각마저 든다.  그가 이룬 학문적 업적, 지녔던 천재적 감수성, 열정 등이 감탄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멘델레예프에 대해서는 기껏해야 중학교나 고등학교 교과서에서, 암기하기 어려운 주기율표를 만든 사람정도로만 기억했기 때문이다.  화학에서 주기율표만큼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은 것이 또 있을까?  주기율표가 차지하는 비중이 그 만큼 크다는 반증이다. 주기율표를 강조한 말 중에서 필자에게 가장 실감나게 표현한 부분을 소개하고자 한다.

 

“멘델레예프가 1869년에 발견한 주기율표가 아니었더라면, 화학의 세계가 이토록 어마어마한 진보를 이룩할 수 없었을 것이다.  주기율표는 기지의 원소에 대한 지식을 혼란의 질서로 바꾸어 놓았으며, 근대화학의 기본적 법칙을 수립하였다.  이는 30대 한 청년의 대단한 성취였다.  멘델레예프는 뛰어난 재능을 지닌 선생, 사회정의를 위한 투사, 러시아의 천연자원개발을 도운 과학자였으며, 주기율표가 받아들여진 지 15년 내에 그가 예언한 미지의 세 원소가 증명되는 등 일생을 통해서 수많은 업적을 남기고 73살을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멘델레예프를 기려 1955년에 만들어진 원소 101번을 멘델레븀 (Md)이라고 부른다”

 

이는 “멘델레예프와 주기율표”라는 책의 서언에 나오는 내용이다.  멘델레예프는 시베리아 에 위치한 토볼스크 시에서 열네 명의 형제들 중 막내로 태어난다.  그의 어머니는 어린 멘델레예프로부터 천재성을 발견하고, 목숨을 걸고 우랄 산맥을 넘어, 페테르부르크 대학의 화학대학에 그를 입학시킨다.  그리고 어머니와 누이는 페테르부르크에서 숨을 거둔다.  우랄 산맥과 시베리아 대륙을 횡단하는 동안, 배고픔, 추위등과 싸우면서 병을 얻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어머니의 이런 갸륵한 희생과 무모한 결단이 없었다면, 멘델레예프 같은 위대한 화학자는 역사상에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는 1834년에 태어나 1907년까지 살았다.

 

멘델레예프의 어머니는 유리공장을 운영하고 있었다.  공장에서 만드는 형형색색의 유리그릇들을 보면서 호기심어린 눈으로 어머니에게 묻곤 하였다.  어머니로부터 배운 지식들을, 총명했던 멘델레예프는 그의 형제들에게 그대로 설명을 해 주곤 하였는데, “크롬의 산화물은 초록색유리를 만들고, 산화망간은 보라색이나 핑크색 또는 자수정 색이 되는데, 얼마나 산화망간을 쓰느냐에 따라 달라.  자주색은 칼륨에서 오거든. 빨간 유리창은 산화구리를 넣어야 돼.  산화코발트는 파란색, 그리고 산화철은 노란색을 만들지.”  어머니는 그의 총명함을 발견할 때 마다, “언젠가 너는 모스크바에 가서 입맛이 당기는 수프처럼 접시위에 담긴 채, 공급되는 지식을 찾을 수 있단다”라고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래서 어린 멘델레예프는 점차 배움의 길로 모스크바를 향한 꿈을 키우게 된다.  나중에 멘델레예프가 대학을 진학한 후, 그의 어머니는 “환상에 사로잡히지 마라, 네길은 말이 아니고, 공부였음을 알아라.  언제나 인내심을 가지고 숭고한 원리의 과학적 진리를 계속해서 추구하거라. 잊지 않겠지?”라는 말을 멘델레예프에게 남기고 세상을 뜬다.

 

그 후, 그의 생활은 강의와 공부가 그의 밤낮과 주말을 차지하였다. 잠도 적게 잤을 뿐 아니라 종종 식사하러 가는 것도 잊었다.  그리하여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할 수 있게 된다.  그 후에도 계속 페테르부르크 대학에서 연구를 하는 도중, 연구 사정이 아주 열악하여, “언제쯤 러시아가 군대 또는 비밀경찰에 쓰는 돈의 단 몇 퍼센트만이라도 과학에 사용할 줄 알게 될지........”라며 푸념을 하게 된다.  그 때나 지금이나 풍족하지 않은 연구비를 사용하며, 푸념을 늘어놓는 것은 마찬가지인 것 같다.

그러던 중, 독일의 하이델 베르그 대학으로 약 3년 동안 공부할 기회를 갖으면서, 멘델레예프의 학문적 성취의 길이 열리기 시작한다.  그 곳에서 키르히호프, 분젠 등의 화학자를 만나게 된다.  그 곳에서 분광스펙트럼, 분젠전지, 광도계, 흡광계, 광량계 등의 기체 분석법을 섭렵하여 러시아로 돌아온다.

 

그 무렵 유럽의 과학자들 사이에는 원자와 분자를 서로 교체가능하게 사용해 왔다.  어떤 이는 “화학원자”라고 불렀는데 아보가드로를 본 받아 원자를 “기본분자”라고 불렀다.  1868년 말 까지 63가지 물질이 원소로 밝혀졌다. 고대 그리스 인들은 7가지 금속원소들을 알았는데, 금, 은, 구리, 납, 주석, 철, 그리고 액체인 수은이다.  수세기 동안 “7”은 신비적 의미를 가졌다.  연금술사들은 비천한 금속을 금으로 전환시키는 데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현대화학의 기초를 다지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멘델레예프의 두 스승, 분젠과 키르히호프가 그들이 발명한 분광기를 이용하여 세슘과 루비듐을 발견하였을 때, 멘델레예프는 여전히 하이델베르그에 있었다. 1861년 영국의 크룩스가 탈륨을, 1863년 라이히와 리히터가 분광기를 이용하여 무르고 은색이며, 스펙트럼에서 남색의 선을 나타내는 금속인 인듐을 발견하였다.  인듐은 63번째로 발견된 원소가 되었다. 

 

이렇듯 원소가 발견될 때마다, 멘델레예프는 속으로 “과학의 궁전에서는 물질만이 아니라 설계도도 필요로 한다.  즉 조화가 필요하다.” 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멘델레예프의 논리적 생각으로는 자연계에서 이 원소들이 까닭도 없이 이유도 없이 마구잡이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믿기 어려웠다.  해를 거듭할수록 멘델레예프는 어떤 연관성을 찾아가기에 주력한다.  그리하여 이 63가지 원소들이 그의 과학적 생애에서 가장 크고, 가장 열중한 도전의 대상이 되었다.  뒤이어 많은 세심한 실험자들이 헬륨을 제외한 모든 알려진 원소들에 대하여 원자량을 확립하게 되었다.

 

멘델레예프는 정확한 원자량을 얻기 위하여 벨기에의 과학자 스타스에게 편지를 써서, 원소들의 원자량에 관한 정보를 얻었다. 칼슘, 철, 비소, 스트론튬의 원자량은 프랑스의 뒤마에게서 받는다. 체코의 닐손은 토륨을, 브라우너 교수는 텔류륨, 란타늄, 그리고 세륨의 원자량을 제공한다.  그리고 멘델레예프는 이들 원자량과 다른 원자량 모두를 스스로의 실험으로 할 수 있는 데까지 검증하였다.  그는 흰 카드의 각장에 있는 원소명 옆에, 그 원소의 원자량을 적어 넣었다.  원자량은 그에게 가장 중요한 단서였으며, 그는 이 카드들을 수소부터 원자량 순서로 배열하였다.  그리고 특성도 적어 넣었다.  가장 신기한 것은, 어떤 원소들의 원자들은 유사한 방식으로 그들을 포함하는 분자들을 형성한다는 것이다.  그는 어떤 원소들의 경우 두개의 원자가 한 개의 산소원자와 쉽게 결합한다는 것을 주의 깊게 관찰하였다.  이를 “원자가”라고 불렀다. 

 

그는 자신의 흰 카드에 그가 축적하여 왔던 모든 데이터 요약인 녹는점, 임계온도, 광택, 퍼짐성, 밀도, 비중과 같은 각 원소에 대한 다양한 정보를 적어 놓았다.  그는 이들로부터 원소들의 수수께끼를 풀 수 있는 숨겨진 암호를 추출할 수 있기를 희망하였다.  이러한 정보를 갖고, 그는 방문을 걸어 잠근 채, 몇 달 동안 원자배열에 몰두하였다.  원자들 간의 규칙을 책상위의 원자량을 비롯한 다른 정보를 가지고, 파악하려 한 것이다.  그 무렵 “ 베라이너의 삼개조”이론으로, 사람들은 보다 포괄적인 원소표를 만들려고 시도하였다. 

 

영국학회에서 뉴렌즈는 “모든 원소를 원자량 순서로 나열하면 매 8번째 원소는 유사하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이 순서를 피아노 건반의 8도 음정 (옥타브)에 비유하였다.  이 특이한 관계를 그는 ‘옥타브 법칙’이라고 잠정적으로 제안하였다.  그의 동료들은 몇 가지 유사성이 있기는 하지만, 그의 ‘8도 음정’에는 화성이 맞지 않은 불협화음이 많다고 지적하였다.  한 회원은 뉴랜즈가 원소들을 알파벳 순서로 배열하였다면, 더욱 성공적이었을 거라고 비꼬면서 말하기도 하였다.  뉴랜즈는 자신의 옥타브 법칙에 대해서 비웃는 반응에 너무나 큰 상처를 받고 과학 연구를 영원히 그만두었다.

 

비교적 과학적이지는 않지만, 감수성에 근거한 실낱같은 희망을 잡는 심정으로 연구를 하였던가 보다.......  그러나 이 비웃음을 받았던 가설은 놀랍도록 정교하게, 오늘날의 각 원자궤도의 채워짐 이론으로 발전된다.

 

멘델레예프도 원자표를 만들면서, 베릴륨의 원자량을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13.7에서 9.4로 왜 바꾸었는지, 또 칼슘이 원자량을 다른 사람들은 20으로 하는데 왜 40으로 했는지에 대하여 물을 것을 알았다. 그는 이 두 원소들의 성질에 비추어 볼 때, 지금 까지 확립된 이 원소들의 원자량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확신하기 때문에, 자의적으로 바꾸었노라고 설명했다.  그런 작업을 몇 달이고 계속하면서, 드디어 1869년 3월 18일 러시아 화학회에서 멘델레예프는 자신의 제자에게 “원소체계의 개요“를 발표하기에 이른다.  그 때 발표한 멘델레예프의 이론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 원소들을 원자량 크기 순서로 배열하면 분명한 주기적 성질을 보인다. (멘델레예프가 원자량 척도에 따른 나열에서 일정간격에 있는 원소들이 서로 유사한 성질을 보인다는 것을 지칭하는 바를 모든 사람들이 파악한 것은 아니었다.) - 지금의 원자의 주기적 성질

2. 화학적 성질이 유사한 원소들은 서로 이웃하는 원자량을 가졌거나 (백금, 이리듐, 오스뮴과 같이), 아니면 원자량이 증가하는 것을 보인다 (포타슘, 류비듐, 세슘과 같이).....

3. 원소 또는 원소 군을 원자량의 크기로 비교하면, 소위 말하는 원소들은 원자수와, 그리고 어느 정도까지는 화학적 특징의 차이를 확립하게 된다......
다시 한번 수수께끼 같은 원자수라는 말을 사용하게 된다.

4. 자연계에 가장 널리 분포되어 있는 단순물질들은 원자량이 작다.......

5. 원자량의 크기가 원소의 특성을 결정한다.  이는 분자의 크기가 복합체의 성질을 결정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6. 우리는 여러 알려지지 않은 단순물질들을 발견할 수 있음을 기대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알루미늄과 유사한 것과 실리콘과 유사한 것으로 이들의 원자량은 65에서 75사이가 될 것이다“  이 기막힌 말의 중요성을 아무도 이해하지 못했다.

7. 원자들의 무게의 크기로부터 원소들의 여러 유사성이 발견된다.......

 

이 발표로 멘델레예프는 그의 명성이 세계에 알려지기 시작한다.  일명 지금의 스타과학자가 되었다는 말이다.  그 후 멘델레예프는 자기 제자에게 아직 발견되지 않은 알루미늄 다음의 원소 (에카-알루미늄)에 대하여 말하고, 정확한 원자량까지 예측하였다.  그리고 붕소 다음의 아직 발견되지 않은 원소까지 원자량과 비중을 예측하면서 말하였다.

 

그 후로, 다른 17개 원소의 원자량도 과감하게 바꾸기 시작하였다. 텔루륨과 요오드의 원자량 순서를 바꾸어 텔루륨은 산소족에 들어가고, 요오드는 플루오르, 염소, 브롬이 들어있는 줄에 들어가도록 하였다.  비슷한 이유로, 코발트와 니켈은 물론 금과 백금의 순서도 바꾸었다.  가장 획기적인 변경은 토륨의 원자량을 116에서 232로, 우라늄의 원자량을 120에서 알려진 원소중에 가장 무거운 240으로 각각 2배로 바꾼 것이었다.  그 사이 시간이 흘러 이와 같은 변경이 모두 타당한 것으로 입증이 되었다.

 
그리고 새로운 16개의 원소들에 대해서 빈칸을 남겨 두었다. 이들 중 에카-알루미늄, 에카-실리콘, 에카-붕소 (여기서 에카는 처음을 뜻함)를 포함한 6가지에 대해서는 대략적인 원자량을 제시하였고, 이 원소들의 몇 가지 성질까지도 기술하였다.  그는 우라늄보다도 원자량이 큰 "초우라늄“ 원소 5개를 예언하였는데, 이는 그가 한 예언 중 가장 기막힌 것 중의 하나이다.

이 모든 예언의 기초는 멘델레예프가 발견한 “원소들의 성질은 원소들의 원자량의 주기적 함수이다.”라는 중요한 이론이었다.

 

그 후로 그의 예언에 대한 증명은 러시아 밖에서 이루어졌다.  1875년 프랑스의 젊은 화학자 부아보드랑은 프랑스의 피레네 산맥의 광산에서 섬아연광의 화학분석을 하던 중, 멘델레예프가 부르던 에카-알류미늄인 갈륨을, 멘델레예프가 예언한 대로의 원자량 (68)과 비중 (5.9)을 얻었다.  이와 같이 그가 예언한 것에 대한 검증은 년차를 두고 모두 사실이 되었고, 그가 예언한 원자량, 비중 등이 발견한 사람들의 오차까지도 교정해 줄 정도였다. 갈륨의 비중도 처음에는 4.7로 발표를 하였다가, 수차례의 실험을 반복한 끝에 멘델레예프가 예측해 놓은 값을 얻는다. 이 때 멘델레예프의 나이 40이었다.  해외에서는 명성이 널리 알려져, 그를 화학계의 원로라고 불렀다.

 

멘델레예프의 업적이 화학의 역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지만, 멘델레예프에 대해서 접하고 난 후, 그가 광적으로 연구에 전념한 화학자이며 단순히 원소의 주기율을 발견한 과학자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조국 러시아의 산업발전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였으며, 황제들의 독거에 끊임없이 항거한 휴머니스트였다. 그리고 놀랍도록 정교하게 발달한 그의 통찰력과 천재성의 산물인 주기율표는 물리학의 상대성이론에 버금가는 화학인의 성취라 하겠다.

 
참고도서: 1. 멘델레예프와 주기율표 (저자: 로빈맥퀸, 역자: 진정일, 박준우, 석원경, 대한화학회) 

              2. 알고나면 너무나 오묘한 원자의 세계(저자: 요네야가 마사노무, 역자: 성지영, 이지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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