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브나라이야기
"인생 2막, 꿈꿔라 준비하라 저질러라…"
부부 나이 더해 100세 되던 해
농사 짓기로 한 약속 지켜
자갈밭을 허브 농장으로 18년간 새벽 5시 기상…
동네선 '평양서 온 여자'라 불러
결혼하면서 부부는 세 가지를 약속했다. 내 집 짓기, 자동차 사기, 나이 오십에 시골 내려가 농사짓기. 고지식한 부부는 서로의 나이 합쳐 100세 되던 해 마지막 약속마저 실천했다.1993년 강원도 평창군 봉평면 흥정계곡에 문을 연 농장 ‘허브나라’. 대한민국 허브 붐의 원조 격인 이 농장은, 한 해 입장객이 50만 명을 넘는 유명 관광지다. 환경부는 2009년 이 농원을 하회마을, 영월 동강과 더불어 생태관광지 20곳 중 하나로 선정했다. 해마다 ‘이문세의 숲속음악회’가 열리고, 윤석화·노영심·이루마가 따로 또 같이 무대를 만든다. 봉평 인구가 ‘허브나라’의 성공 이후 다시 늘고 있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인생 2막' 치고는 참으로 화려한 성취를 이룬 '바른 생활 부부'의 처세가 궁금했다. 얼마나 수완이 좋기에? 마침 18년간 좌충우돌하며 일궈온 그들의 농사일기가 '허브나라 이야기'(반비)로 출간됐다. 교통체증, 터무니없이 비싼 입장료, 조악한 풍광으로 요약되는 '빈 수레 유명관광지'에 대한 선입견은 이두이·이호순 부부가 일군 허브나라를 찾아간 지난 23일 여지없이 깨졌다.
◆여왕? 나는 허브나라 농순이―이두이 이야기
밀레의 '이삭줍기'에 나오는 여인처럼 이두이(65)는 챙 넓은 모자에 커다란 앞치마, 장화 차림이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이 모양새다. 문제는 그 퉁명한 성격이다. 여간해서 웃는 일이 없다. 새벽 5시에 일어나 밤 9시까지 그녀가 하는 일이란 오로지 농사와 관련된 일이다. 해 뜨기 전 농장을 한 바퀴 돌며 그날 할 일을 메모하고, 직원들 출근하기도 전에 일의 절반은 알아서 해치운다. 23일에도 이두이는 밭에 있었다. 만발한 금잔화(칼렌둘라) 꽃송이를 뚝뚝 따서 바구니에 담기에 연유를 물었다. "이렇게 따줘야 새 꽃을 피워요. 불쌍하다고 안 따면 더이상 꽃을 피우지 않지요." 지나던 관광객이 물었다. "아줌마, 그 꽃은 따서 뭐에 써요?" "먹어요. 꽃비빔밥 만들어 고추장에 비벼서 먹어요."
"기본 생계는 되어야 하지 않나. 경제성을 따지는 건 당연하다."
―삼수까지 해서 서울대 농과대학에 들어갔다. 나이 오십에 농사지으러 시골 가자고 제안한 것도 부인 쪽이라던데.
"난 어릴 때부터 생명·자연을 다루는 일이 좋았다. 숲에 들어가 나무 사이로 들어오는 햇살을 맞으며 누워 있으면 모든 고민이 해결되더라. 사상적으로 농업을 숭배하는 남편을 만난 것도 농사를 우리 생의 궁극적인 목표로 세운 이유가 됐다."
―말이 농사지, 그야말로 고된 육체노동을 요하는 업이다.
"이 땅이 옛날에 개울이어서 땅만 파면 돌이 나왔다. 삽질, 괭이질, 돌 고르기를 이제 남자들보다 더 잘해서 마을 사람들이 날 '평양에서 온 여자'라고 부른다.(웃음) 마귀할멈처럼 직원들에게 소리를 지르는 게 문젠데, 자기들과 똑같이 일하고, 음식만큼은 맛있게 배불리 먹자 주의인 나를 그리 싫어하는 것 같진 않다."
―가장 힘든 점은 뭘까.
"꽃을 항상 피워야 하는 거. 관광객들은 식물의 어린 시절이나 꽃이 져서 시든 모습을 인정하지 않는다. 봉평은 4월이 봄이 아닌데도, 손님들은 꽃이 없다고 욕을 하신다. 초반엔 화가 나서 뒤쫓아가 싸우기도 했다. 꽃이 없으면 식물이 아니냐고.(웃음). 결국은 손님들에게 졌다. 사계절 내내 꽃을 볼 수 있도록 계절마다 꽃을 바꿔 심는다. 4월엔 팬지·조팝나무·메리골드를, 5월엔 튤립·꽃사과·포피를, 6월엔 캐모마일·산사나무·인동이 피어난다. 며칠 전엔 백합 모종을 심었다. 두 달 뒤에 꽃을 피워야 하니까."
―보통 부지런하지 않고는 못할 일이다.
"나는 '인생은 하루'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다시 오지 않을 시간이고, 이 하루를 어떻게 살았느냐는 것이 미래를 보장한다."
―5년 뒤면 칠순이다. 아픈 데는 없으신가.
"너무 잘 먹어서 탈이다."
―몇해 전 강원도에 큰 수해가 났다. 허브나라도 물난리를 입었다.
"자연의 순리인데 따라야지 어쩌겠나. 사람만 다치지 않으면 된다. 복구는 새로운 창조다."
―한때 2000개까지 생겨났던 허브농원들이 요즘 부진을 면치 못하고 있다. 이두이가 생각하는 허브나라의 성공 비결은 뭔가.
"끝없이 새 옷을 갈아입는 거. 300평에서 시작했다가 1만평으로 농장을 넓혀가면서 히스토리를 만들어온 거. 하도 이어붙여서 투박하고 촌스럽지만 그래서 오밀조밀 얘깃거리가 많은 게 우리 농장이다. 최근 조성한 '팔레트 정원'이 가장 뿌듯하다. 평지 끄트머리에 일부러 30m 흙을 쌓아 능선처럼 보이게 한 뒤 팔레트에 물감 짜놓듯이 색색깔의 꽃 정원을 꾸몄더니 많이들 좋아하더라."
―노상 몸을 움직여야 하는 삶이다. 일하기 지긋지긋하지 않나.
"노동할 수 있다는 건 삶의 축복이다."
◆대기업 사장보다 농사가 좋더라―'공돌이' 이호순 이야기
이두이는 "이호순이란 남자와 결혼한 게 내 인생에 가장 잘한 일"이라고 말했다. 평생 '노(No)'라고 말하는 법 없고, 세 가지 약속을 모두 지켰기 때문이다. 서울 공대를 나와 삼성전기에 입사, 자회사인 청주전자 CEO까지 했지만 이호순은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이라고 굳건히 믿는 남자다.
―평생 '노(No)'라는 말을 안 하셨다던데, 사실인가.
"노 한다고 해서 들을 사람인가.(웃음) 일중독에다 배움에 대한 욕심으로 똘똘 뭉친 여자다."
―서울대 공대를 나왔다. ‘사상적으로 농업을 숭배하는 남편 덕분에 농사의 꿈을 펼칠 수 있었다’는 부인의 말은 무슨 뜻인가.
“전주고 다닐 때 농촌계몽 바람이 불었다. ‘사상계’라는 잡지가 베스트셀러였고, 함석헌 선생의 가르침, 류달영 선생의 ‘인생 노트’ 같은 것이 젊은이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농대에 가고 싶었는데 부모님 반대로 방향을 틀지 못했다. 대신 틈날 때마다 농대에 가서 살았다. 아내도 거기서 만났고.”
―CEO였고 정년도 안됐는데 사표를 쓰고 봉평으로 들어간 용기가 대단하시다.
“새벽에 출근해 그날 안에 집으로 들어오기 힘든 월급쟁이 생활이었다. 원 없이 일했고 그만큼 성취도 컸지만, 시골에서 농사짓겠다는 꿈은 변함이 없었다.”
―부부의 첫 번째 약속이 ‘집 짓기’더라. 보통은 큰 평수 아파트를 사는 게 꿈 아닌가.
“벼락부자 되는 일에 둘 다 관심이 없었다. 삼성 동기 중에는 주식하고 부동산 투자해서 돈 많이 벌던데, 우리는 수원 팔달산 아래 작은 집 하나 지어놓고 세상을 다 얻은 듯 행복해했다.”
―서울도 아니고 왜 수원 팔달산인가.
“직장이 수원에 있었다. 집을 재산증식 수단으로 여겼다면 신갈이나 동수원에 샀겠지. 마당에 매실·모과·대추·마로니에·단풍·목련·살구·앵두를 심어 내내 꽃을 보며 살았다. 봉평 오기 전 20여 년을 산 집이다.”
―‘보여주는 농사’ 아이디어는 어디서 얻었나.
“일본 출장이 잦아서, 선진농업국인 일본의 농장들을 둘러볼 기회가 많았다. 지바현에 있는 ‘허브 아일랜드’를 보고 이거다 싶더라. 농사가 관광자원이 될 수 있다는 확신을 보여준 곳이다.”
―회사를 그만두기 전부터 준비하신 셈이다.
“은퇴 후 준비하면 늦다. 특히 귀농은 늦어도 50세부터는 시작해야 한다. 기력이 약해지면 농사를 지을 수 없으니까.”
―왜 봉평이었나.
“휘닉스 파크가 생긴다는 풍문에 땅값이 많이 올라 있었지만, 흥정계곡을 보고 마음을 빼앗겼다. 철쭉으로 둘러싸인 계곡에, 소나무군락, 기암괴석들까지. 처음엔 지인 5명이 힘을 합쳐 땅을 샀는데 다들 중도하차하고 우리만 남았다.”
―땅에 삽질 한번 안 해본 사람도 농사를 지을 수 있을까.
“화분 하나 키워봤으면 할 수 있다.”
―그런데 왜 많은 사람이 귀농에 실패할까.
“돈을 벌어야 한다는 강박 때문이다. 도시 생활을 완전히 버리지 않고 양다리를 걸치기 때문이다. 농사에 올인해야 한다. 돈이 아니라 남은 인생을 즐긴다는 마음으로 와야 한다. 거창하게 시작할 것도 없다. 수입원으로 작은 카페, 혹은 방 한두 칸 팬션으로 운영하면서 차츰 농사를 확대해나가면 된다.”
―귀농의 복병은 원주민이더라.
“어디나 텃세가 있으니까. 땅 투기하러 온 사람들로 보였을 거다. ”
―주민들로부터 고발도 여러 차례 당하셨다.
―법정스님이 생전에 ‘허브나라’를 즐겨 들르셨다고 했다.
“1년에 한두 번. 오대산에서 수행하실 때 오며 가며 들르셨다. 아내가 담근 갓김치를 맛있게 드셨다. 허브 아이스크림도 좋아하셨고, 다들 하찮게 여기는 낙엽송, 참나무 한 그루 베어내지 않고 집 지은 걸 칭찬하셨다.”
―이시형 박사도 오랜 단골이더라.
“99년인가 식당 창가에 낯익은 신사 한 분이 식사를 주문하셨다. 그 무렵 팬션 몇채도 지어놓았는데 집필할 공간이 있는지 물으시더라. 허브나라에 ‘문화’를 만들어주신 분이다. 주말마다 작은 음악회를 열고, 설치미술전을 열고, 터키박물관을 만든 것도 이 박사 덕분이다.”
―노영심, 이문세 같은 연예인들과는 어떤 사이인가.
“잡지 기사를 보고 영심씨가 찾아왔다. 15년 인연인데 언제 봐도 소박한 친구다. 매해 겨울 다문화 가정의 아이들 초대해 ‘달의 크리스마스’라는 나눔 음악회를 진행한다. 영심씨가 문화계 마당발이라 이문세의 숲 속 음악회도 기획하게 됐고. 그 덕에 사위도 연극 연출하는 사람(최우진)을 얻었다.”
―허브나라는 부인이 대장이고, 남편이 외조하는 형국이다.
“수컷은 젊어서만 왕이지 늙으면 여자 세상이다.(웃음) 장가는 잘 갔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할 일이 많으니까.”
◆‘엄마의 정원’에서 그리는 수채화―‘미순이’ 이지인 이야기
이지인(38)은 이호순과 이두이의 딸이다. 책 ‘허브나라 이야기’에 그림을 그렸다. 허브나라의 간판부터 조형물, 미술장식이 모두 그의 솜씨다. 서울대 서양화과를 수석 입학했던 재원이다. 하지만 부모를 따라 봉평으로 들어온 뒤 “붓을 꺾고” 자칭 ‘미순이’가 되었다. 지인씨는 “그래도 행복하다”며 맑게 웃었다.
―부모가 농사짓고 살겠다 선언했을 때 동의하셨나.
“우리 부모님은 그런 일에 자식들 동의를 구하는 분들이 아니다.(웃음) 당신들 인생이고, 따라오려면 따라오라는 식이지. 대학 3학년 때라 서울에 남아 친척집에서 학교를 다녔고 졸업하고 봉평으로 내려왔다.”
―귀농이 썩 마뜩잖았던 표정이다.
“방학에 잠깐씩 내려와 농장 일 거들 때는 재미있더니, 막상 ‘삶’으로 살려니 힘들더라. 새우깡 하나를 먹고 싶어도 면까지 나가야 하니 얼마나 답답한가. TV라도 놓자고 만날 엄마랑 싸웠다.”
―책에 보니 장래에 대한 문제로 엄마와 크게 싸웠다는 대목 나오더라.
“친구들은 서울에서 작업하고 전시 여는데 나만 도태되고 있다는 생각에. 엄마는 그림은 아무 데서나 그릴 수 있지 않으냐고 하셨지만, 나는 도시의 치열한 삶 속에서, 어두컴컴하고 지저분한 작업실에서 작품이 나온다고 믿었다.”
―떠나지 그랬나.
“서울에 작업실 만들어 나간 적이 있다. 그런데 거기서도 허브나라 그림을 그리고 있더라.(웃음)”
―서울대 미대를 수석으로 입학했다.
“입시 미술의 선수였을 뿐이다. 친구들이 내 그림을 두고 ‘입시수채화의 정수’라고 놀렸다.(웃음) 정작 대학 들어와 감당 못할 자유가 주어지고 ‘네 마음대로 그려라’ 하니 막막하더라.”
―어릴 때부터 줄곧 1등을 놓치지 않은 딸이었다.
“엄친아, 엄친딸 부러워할 이유 없다. 나만 봐도 그렇지 않나. 낙제생이던 우리 오빠가 나보다 훨씬 행복하게 산다.”
―엄마 이두이는 어떤 사람인가.
“전업주부일 때도 꽃꽂이부터 양초공예, 염색, 궁중요리까지 섭렵하신 분이다. 나이 마흔에 대학원까지 다녔으니 말 다 했지. 앞뒤를 별로 재지 않고 일단 저지르고 보신다. 돈키호테처럼.”
―허브나라에서 계속 살 생각인가.
“해마다 허브나라 캘린더 만드는 게 아직은 큰 기쁨이고 보람이다. 2008년 캘린더의 제목이 ‘엄마의 정원’이었다. 캐모마일 밭에서 꽃을 따는 엄마, 배추밭에서 배추를 한 아름 안고 환히 웃는 엄마…. 허브나라의 사계절과 그곳을 강인하게 지켜가는 엄마의 모습이 자랑스럽다.”
◆낙제만 하던 아들 ‘허브나라’의 꿈이 되다―이승택 이야기
이지인이 부러워한 오빠 이승택(39)은 낙제생이었다. 미술만 빼고 전 과목이 ‘미’ 이하였다. 만화 읽고 게임만 하는 아이였다. 고3 때 아버지가 담임선생에게 호출됐다. “이 점수로는 대한민국 어느 대학도 갈 수 없습니다.” 이호순은 아들을 혼내지 않았다. “대학은 안가도 된다. 네 인생에 자신감을 갖고 살아라.” 이승택은 영어 한마디 못하면서 미국으로 건너갔다. 만화와 게임밖에 몰랐던 그를 미국에서는 ‘크리에이티브(creative)하다’고 했다. 뉴욕의 스쿨 오브 비주얼 아트(SVA)를 졸업하고 타임지 인터넷 부서에서 근무한 뒤 NYU에 들어가 석사를 받았다. 거기서 만난 에릭 짐머만이라는 친구와 게임을 만들어 여러 공모전에서 수상했고, 게임 판권을 판 돈으로 뉴욕 맨해튼에 게임랩 회사를 설립했다.
―낙제생의 성공이 놀랍다.
“부모님이 끝까지 날 믿어주신 덕분이다.”
―2년 전 한국으로 돌아와 ‘놀공발전소’를 세웠다.
“미국서 20년을 살았다. 결혼해서 아이 둘을 낳았더니 명절에 온 가족이 떠들썩하게 모여 놀던 품이 그립더라. 한국에서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많을 거라 믿었다.”
―놀공발전소가 뭔가.
“뉴욕에서 게임회사를 운영해 번 돈으로 2006년 ‘인스티튜트 오브 플레이’(놀이연구소)를 세웠다. 게임을 교육에 활용하고 싶었다. 당시 소규모 학교를 설립하는 빌 게이츠 재단의 프로젝트가 있었는데 게임을 테마로 한 학교 ‘퀘스트 투 런(Quest to Learn)’이 당선됐고, 1000명의 아이를 키우는 공립학교를 설립했다. ‘놀듯이 공부하는’ 학교를 한국에도 세우고 싶다.”
―놀공발전소는 현재 어떤 일을 하고 있나.
“지난 1월 유니세프와 함께 첫 캠프를 열었다. 우리 교육엔 ‘나’가 없지 않나. 그래서 아이들이 쉽게 지치고 힘들어한다. 게임에 빠져드는 이유는 거기에 ‘나’가 있기 때문이다.”
―가업을 이어가야 할 텐데.
“동생이 잘하고 있고, 내 몫은 허브나라에 새로운 콘텐츠를 개발하는 것이다. 게임하듯 공부하는 학교를 허브나라에 만들 거다.”
―부모에게 물려받은 가장 큰 DNA는 뭘까.
“돈을 좇아가는 게 아니라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 사는 것. 엄마처럼 잘 저지르는 편이고, 아버지처럼 낙관적이다.”
―두 아이가 모두 허브나라에서 자라고 있다
“서울서 사교육 시킬 돈 있으면 여행 보내는 게 낫다. 부모가 할 일은 아이가 타고난 재능을 찾아서 격려하는 것뿐이다.”
봉평 허브나라엔 3대가 산다. 이두이는 “아들, 손자, 며느리가 다 모여 사니 개구리 가족”이라고 자랑했다. “달과 별을 헤아리면서 함께 사는 자식들과 손주들, 나를 행복하게 해주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것이 이곳에 있지요. 자연을 내 것으로 삼고 사니 우리만 한 ‘재벌’이 또 있을까요?” ‘여왕’ 이두이가 활짝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