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 살리는 엔도르핀, 마을기업
중앙일보 기획연재
지난달 31일 일본 도쿠시마현 가미카쓰 마을에서 하리키 쓰네코 할머니(89·왼쪽)와 며느리인 하리키 시게미(64)가 태블릿PC로 나뭇잎 시세와 주문 정보를 확인하고 있다. 주문을 보고 먼저 응하는 주민이 나뭇잎을 납품할 수 있어 태블릿PC를 자주 확인해야 한다. [가미카쓰=김원배 기자]
고령화와 도시화에 따른 농어촌 마을의 쇠퇴는 선진국도 피해 갈 수 없는 문제다. 일본과 영국에선 1980~90년대부터 주민들이 마을기업을 세워 지역 살리기에 나섰다. 고령화한 마을에 일자리가 생기고 소득이 늘어나기 때문이다. 국내에서도 지난해부터 마을기업이 설립되기 시작했다. 일본과 영국 현지 취재를 통해 ‘지역을 살리는 엔도르핀, 마을기업’ 시리즈를 3회에 걸쳐 소개한다.
지난달 31일 일본 도쿠시마(德島)현 가미카쓰(上勝) 마을 농가 작업실에는 깨끗하게 손질된 단풍나무 잎이 하얀 박스에 쌓여 있었다. 올해 89세의 하리키 쓰네코(針木恒子) 할머니와 며느리인 하리키 시게미 (針木繁美·64)는 나뭇잎 손질을 잠시 멈추고 자그마한 태블릿 PC를 켰다.
이 태블릿PC는 일본의 이동통신사인 NTT도코모가 지난 6월 이 마을에 지원한 삼성전자의 갤럭시탭이었다. 주민들은 갤럭시탭을 통해 일본 전역에서 들어오는 단풍나무 잎 주문과 시세 등을 확인한다. 주문을 가장 먼저 보고 신청을 하는 농가 한 곳만 단풍나무 잎 등 각종 나뭇잎을 납품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실적을 내려면 부지런히 태블릿PC를 확인해야 한다. 하리키 시게미는 “한 시간에 한 번씩만 주문에 응할 수 있게 돼 있다”며 “하루에 50박스(500팩)를 공급해 마을 전체에서 1등을 한 적도 있다”고 말했다. 일부 농가는 나뭇잎만으로 연간 1000만 엔(약 1억5000만원)이 넘는 소득을 올리고 있다.
산골 마을에서 가장 흔한 나뭇잎을 가지고 사업을 하지만 이를 처리하는 시스템은 첨단을 달린다. 이런 정보를 제공하는 곳이 마을기업인 이로도리다. 사업 초기에는 팩스를 이용해 나뭇잎 주문 정보를 보냈다. 그 이후엔 가정에 PC를 보급했다. 이제는 밭에서 일을 하면서도 주문을 볼 수 있게 태블릿PC까지 도입했다.
나뭇잎 사업을 하기 전 가미카쓰 마을은 미래가 보이지 않았다. 임업은 해외에서 수입된 목재로 경쟁력을 잃었고, 감귤 농사도 치열한 경쟁에서 밀렸다. 젊은이들이 불편하고 힘들고 수입도 없는 산골을 떠나자 마을에는 노인들만 남았다.
그러다가 한 사람이 마을을 살리는 아이디어를 생각해 냈다. 주식회사 이로도리의 대표인 요코이시 도모지(橫石知二·53)다. 요코이시 대표는 대학을 졸업하고 1979년 가미카쓰 농협의 영농지도원이 됐다. 그는 86년 오사카(大阪)의 식당에서 한 손님이 “나뭇잎이 예쁘네. 집에 가져 가야지”라는 말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사업을 시작했다. 농협을 중심으로 나뭇잎 사업을 하던 주민들은 99년 정식으로 마을기업을 설립했다. 마을사무소와 함께 민관 합동 출자 방식으로 주식회사 이로도리를 설립하고 요코이시를 대표에 앉혔다. 하리키 쓰네코는 “나뭇잎은 가벼워 나이 든 사람도 쉽게 모을 수 있다”며 “나뭇잎 사업이 성공한 후 마을을 찾는 사람이 늘었고 마을에 활기가 돈다”고 말했다.
현재 일본과 영국에선 마을기업이 농어촌 지역을 살리는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영국에는 약 6만2000여 개, 일본도 6만여 개의 마을기업(사회적 기업 포함, 미쓰비시UFJ리서치&컨설팅 추산)이 설립돼 활동하고 있다. 우리나라도 지난해부터 정부 차원에서 마을기업 육성을 시작했다. 행정안전부는 올해 248억원의 예산을 편성해 539개의 마을기업을 지원했다.
대전시 대덕구 장동 장동마을 50~60대 주민 16명이 1인당 10만원씩 출자해 설립한 장동영농조합법인도 이 중 하나다. 주민들은 근처에 계족산 관광지가 있다는 것에 착안해 지난 6월 게스트하우스 사업을 시작했다. 행안부에서 5000만원을 지원받아 구청 소유의 주민문화센터를 게스트하우스(방 3개)로 보수했다. 하룻밤 자는 데 1인당 5000원을 받고 마을에서 나는 농산물도 판매한다. 지금까지 2000만원의 수입을 올렸지만 각종 비용 지출을 감안하면 순이익은 거의 없다. 황태문(67) 장동영농조합법인 대표는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마을을 살리기 위해 기업을 만들었지만 아직은 초기 수준”이라며 “출자자 수를 늘리고 민박이나 홈스테이를 하는 방안도 구상 중”이라고 말했다. 김원배·전영선 기자
<중> 영국 시골마을 살린 ‘주민 주주의 힘’
영국 런던에서 서쪽으로 약 110㎞ 떨어진 옥스퍼드셔 타클리는 전형적인 시골마을이다. 인구가 1000명 남짓한 마을 중심부에는 주민들이 설립한 ‘올인원센터(All-in-one Centre)’가 있다. 1층짜리 올인원센터는 마을의 유일한 수퍼이며 세탁소이자 우체국이다. 이 마을도 인구 감소와 고령화를 피해갈 수 없었다. 젊은이들은 도시로 떠났다. 그러자 상점이 문을 닫고, 우체국 같은 공공시설과 편의시설이 사라졌다. 마을이 공동화할 위기였다.
고민 끝에 타클리 주민들은 2004년 아이디어를 냈다. 주민들의 출자와 모금, 대출 등으로 40만 파운드(약 7억2000만원)를 마련해 ‘타클리 올인원센터’라는 마을가게(마을기업)를 세웠다. 지난 7일 올인원센터에서 만난 바버라 보한 대표는 농가에서 들여온 달걀을 옮기느라 분주했다. 센터를 찾은 92세의 존 오스틴 할아버지는 “운전을 못 하고 혼자 생활하기 때문에 이 가게가 없었다면 살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올인원센터가 자랑하는 것은 ‘자립’이다. 가게를 만들기 위해 주민들이 빌렸던 돈을 2년 전에 모두 갚았다. 이 센터의 연간 매출액은 20만 파운드(약 3억6000만원). 지난해는 4000파운드(720만원)의 순이익을 냈다. 순이익은 마을 자선사업에 썼다. 보한 대표는 “마을에 꼭 필요한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만든 가게이기 때문에 많은 이익을 낼 필요는 없다”며 “적자만 내지 않고 운영할 수 있다면 충분하다”고 말했다. 주민들은 마을을 떠나지 않고 적극적으로 올인원센터 운영에 참가했다. 주주로 등재된 70여 명의 주민들은 이사회를 구성해 센터를 이끌고 있다.
타클리에서 20㎞ 떨어진 이슬립도 버스 노선이 없는 인구 500명의 작은 마을이다. 이곳에도 주민들이 돈을 모아 설립한 마을가게 ‘빌리지숍(village shop)’이 있다. 헨리에타 레슬리 대표와 30여 명의 자원봉사자들이 운영한다. 레슬리 대표는 “외부 지원 없이 주민들이 스스로 가게를 운영한 결과 가게는 마을의 구심점이 됐고, 주민 간 유대도 강해졌다”고 말했다.
이제 막 시작한 한국의 마을기업에선 아직 정부 지원이 ‘생명줄’이다. 인구 8만 명의 전북 완주군은 한국형 마을기업의 실험장으로 꼽힌다. 현재 70여 개의 마을기업이 사업을 하고 있다. 완주군 고산면의 영농조합법인인 ‘건강한 밥상’도 이 중 하나다. 조합원 100명이 1200만원의 자본금을 마련해 사업을 시작했다. 행정안전부 지원금 7000만원, 전라북도 공동체사업 지원금 3억1000만원이 투입됐다. 건강한 밥상은 고추·깻잎 등 지역 농산물 11개 품목을 포장한 ‘꾸러미’를 개당 2만5000원에 판다. 직원도 15명이나 고용해 주위의 기대를 받고 있는 사업이다. 하지만 현재는 꾸러미 하나를 팔 때마다 1000원씩 손해를 본다. 전북도의 직원 인건비(110만~150만원) 지원이 끝나는 2014년까지 자립해야 하는데 판로 개척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노재석 대표는 “매월 1만 개 이상을 팔아야 수지를 맞출 수 있는데 현재는 한 달에 5000개 정도가 팔린다”며 “학교나 음식점에도 농산물을 공급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달 22일 전북 완주군 고산면의 마을기업인 ‘건강한 밥상’의 사업장에서 직원들이 고객에게 배달할 농산물 박스를 포장하고 있다. 지난해 10월 지역 주민의 출자와 정부의 지원을 받아 설립된 건강한 밥상은 조합 농가에서 재배한 11가지 농산물을 ‘꾸러미’라는 이름으로 판매하고 있다. [완주=프리랜서 오종찬]
새로 생긴 마을기업이 어려움을 겪는 것은 선진국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들을 도와주는 전문가들이 한국보다 많다. 영국엔 약 350개의 중간지원조직이 있다. 그중 하나인 플렁켓재단의 마이크 페리 정책팀장은 “마을기업에 자금을 지원할 펀드를 물색하고 회사 설립 과정에서 필요한 법무·회계 관련 상담, 마을기업 간 네트워크 구축을 지원하고 있다”고 말했다. 일본은 2005년 4월 지역재생법을 만들어 마을기업을 육성하고 있다. 실질적인 지원은 중간지원조직을 통해 이뤄진다. 마을기업을 지원하는 오사카NPO(비영리기구)센터의 야마다 히로코(山田裕子) 사무국장은 “마을기업의 성패는 해당 지역의 네트워크를 활용해 판매처를 제대로 확보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고 말했다. 그는 “2006년부터 마을기업에 자금(50만~300만 엔) 지원을 했는데 최근에는 경영 컨설팅에 주력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일본에선 의욕 있는 외부 사람과 지역 주민들이 함께 운영하는 마을기업도 나타나고 있다. 일본 에히메현(愛媛縣) 가미지마초(上島町)의 ‘시마노회사’는 수산물과 소금 등 섬 의 특산품을 인터넷으로 판매한다. 최근에는 방치된 섬의 밭을 도시민들에게 분양하고 여기에서 재배되는 농산물을 보내주는 ‘시민농원’ 사업도 시작했다. 회사 대표는 도쿄에서 회사원으로 일하다 일본의 차세대 리더를 키우는 교육기관인 마쓰시타 정경숙(26기)에서 공부한 가네토 가쓰시(兼頭一司·40)다. 나뭇잎 판매 사업을 하는 일본의 마을기업 ‘이로도리’는 마을기업을 이끌 인재를 키우기 위해 2년 전부터 일본 전역의 젊은이를 대상으로 인턴 과정을 운영하고 있다.
한국에서도 마을기업을 체계적으로 육성하자는 움직임이 있다. 민주당 문학진 의원 등 21명은 지난달 19일 ‘지역공동체 자립형사업 육성에 관한 법률안’을 발의했다. 법안에는 5년 단위로 마을기업을 육성하는 종합계획을 수립하고, 마을기업을 지원하는 ‘지역공동체 자립형사업 진흥원’을 설립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마을기업 지원사업을 하는 행안부 이승우 지역희망일자리추진단장은 “앞으로는 마을기업의 숫자를 늘리기보다는 제대로 성장할 수 있도록 컨설팅과 디자인 지원, 판매망 확보 지원 등에 주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원배·전영선 기자
◆중간지원조직=마을기업과 중앙정부, 지자체 등을 연결하는 역할을 한다. 마을기업의 창업과 경영을 지원하고, 정부와 기업에서 받은 자금도 심사를 거쳐 마을기업에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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