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我/농림축창고

춘천식 메밀냉면

 

맛따라기

공덕동 주택가 골목에 있는 무삼면옥.

 

개성이 가장 강한 냉면일 것이다. 평가는 0점부터 100점까지 엇갈린다. 평점 분포도 양 끝으로 크게 쏠리는 M자 곡선을 그린다. 메밀국수를 국물에 말거나 양념에 비벼 먹는 평양냉면 형식이지만 평양냉면이라는 말은 쓰지 않는다. ‘물·비빔(간장 또는 고추장) 메밀냉면’이라 부른다. MSG·설탕·색소 안 쓰는 ‘무삼면옥’

6년 전 ‘물 메밀냉면’으로 시작한 첫 만남은 충격이었다. 냉면 탐구생활 40여 년을 통틀어 가장 특이한 냉면이었다. 맹물처럼 맑은 국물은 무염식인 듯 싱겁고 고기 맛은 진한 표고 향에 눌려 가물거렸다. 메밀국수 맛은 반짝반짝 빛났다. 평양이나 함흥처럼 원적을 밝혀 부르자면 ‘춘천냉면’이라 해야 음식의 특징과 개성을 제대로 알리는 이름일 듯하다. 이 메밀냉면이 “춘천지역 의병마을인 가정자 마을 제조방식을 이어받은 메밀면”이라는 설명이 음식점 벽에 걸려있으니 말이다.
 
꼭꼭 씹으면 구수하고 차진 맛 올라와
 

대표 메뉴인 간장 비빔 메밀냉면. 집안에 전해 내려오는 어육간장과 들기름에 푸짐하게 올린 목이버섯과 100% 국산 메밀 향이 어우러 진다.처음엔 충격이었지만, 시장할 때 가끔 이 집 메밀냉면이 생각났다. 먹을 때는 맛이 없는 듯한데 다 먹고 나면 맛을 알 것 같고, 시간 이 지나면 먹고 싶은 생각이 들어 점차 찾아가는 냉면집이 됐다. 지난달 초에도 문득 생각나 혼자 가서 대표 메뉴인 ‘간장 비빔 메밀냉면’을 먹었다.
요리사의 자신감인 듯, 힘차고 풍부한 맛이 느껴졌다. 첫입엔 ‘뭔 맛인가’ 싶지만 먹을수록 맛이 살아난다. 꼭꼭 씹으면 당일 제분한 봉평 메밀 100% 면의 구수하고 차진 맛이 그윽하게 올라온다. 질감이 전혀 다른 목이와 메밀국수가 번갈아 씹히고, 어육간장·들기름이 거기 스며 맛은 ‘따로 또 같이’, 현악 사중주 같은 하모니를 입안에 펼친다. 이날 입이 느낀 평점은 90점 이상.
 

맹물처럼 맑은 국물의 물 메밀냉면.

 

요즘 들기름에 비벼 먹는 메밀국수가 유행한다. ‘들막’이라는 줄임말이 통용될 정도다. 몇몇 음식점 대표메뉴로 자리 잡더니 간편식 배달시장에 진출하고, 한 식품 대기업은 유명 막국수식당과 손잡고 며칠 전 ‘들기름막국수’ 제품을 출시했다. 이들은 대개 들기름·조미간장·김가루로 맛을 낸다.
 
간장 비빔 메밀냉면은 간장과 들기름을 넣는다는 점에서 ‘들막’과 비슷하다. 하지만 다르다. 손님의 입맛에 따라가는 게 아니라 주인의 음식 맛을 알고 찾아오는 손님을 묵묵히 기다리는 음식철학과 고집이 다르다. 막국수가 아니라 메밀냉면이라 하고, 주연 조미료를 들기름이 아닌 간장으로 내세운 작명이 다르다. 음식 구성은 더 다르다. 향이 강한 김가루는 안 쓴다. 대신 목이버섯을 듬뿍 얹고 고명에 표고가 올라가는 게 색다르다.
 

고추장 비빔 메밀냉면. 아주 맵지는 않다.

 

언뜻 보면 비슷하지만, 전혀 다른 메밀 음식을 내는 이곳은 ‘무삼면옥’(서울 마포구 마포대로12길 50). MSG·설탕·색소를 음식에 쓰지 않는 국숫집이라는 뜻이다. 국내 굴지의 전자회사에 다니던 이재근(58)씨는 만 50세 되던 2013년 회사를 그만두고 이 냉면집을 열었다. 만일에 대비해 학생들 가르치는 학원을 차려 집에 생활비를 댔다. 이 상황은 아직 진행형이다.
 
나름대로 치밀하게 준비해 시작하고 각오도 했으나 사람들 입에 인이 박인 ‘마법의 백색가루’들을 일절 안 넣는 음식에 대한 반응은 차가웠다. 국산 메밀쌀을 당일 제분해 2시간 이내에 반죽한 100% 메밀국수를 뽑아 건강한 재료로 인공의 맛을 최소화해 요리한 자연 친화 냉면이지만 악평이 더 들렸다. ‘맛의 진공’이라거나 ‘무미(無味)의 절정’이라는 등 수사도 화려했다. 그래도 주인은 일편단심, 손님 취향에 맞춰 음식을 바꿀 생각이 전혀 없다.
 

식당 입구에 설치된 제분기로 메밀쌀을 당일 제분해 사용한다. 박종근 기자

 

이씨는 “초기엔 한 젓가락 뜨더니 ‘못 먹겠네’ 하며 일어난 손님도 있었다”며 “3년은 말이 많더니 저절로 정리가 돼 중·장년층을 중심으로 이 맛을 좋아하는 손님만 오는 집이 됐다”고 회고했다. 단-짠-맵 자극의 시대에 ‘냉면 의병운동’이라도 하려는 걸까. 그는 “노년에 고향 가서 살 때 할 수 있는 사업으로 미리 준비했다”며 “전국 유명한 칼국수집은 안 가 본 데가 없을 만큼 국수를 좋아하고, 귀향을 생각하니 고향에서 많이 먹던 메밀냉국수를 알리고 싶어 냉면집을 열었다”고 한다. 냉면이 평양·함흥에만 있는 게 아니고, 냉국수를 한자로 쓰면 냉면 아니냐는 게 그의 의견이다.
 

봉평농협에서 판매하는 100% 메밀쌀. 박종근 기자

 

그의 고향 춘천시 남면 가정리는 1895년 명성황후 시해사건과 단발령에 분격한 유생들이 임금을 지키고 일본을 몰아내자며 봉기한 을미의병의 주요 거점이었다. 외당 유홍석(畏堂 柳弘錫·1841~1913)과 며느리인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의병지도자 윤희순(1860~1935)이 그 중심에 있고, 제천 일대에서 의병을 이끌다가 1910년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해 의병세력 통합체인 13도의군 도총재로 추대된 의암 유인석(毅菴 柳麟錫·1842~1915)도 이 마을 사람이다. 러시아 우수리스크 고려인문화센터 앞마당에는 의암 추모비가 홍범도 장군, 안중근 의사 비와 나란히 서 있어 항일독립운동사에서 그의 위상을 알려준다.
 
의병에 가담했던 사람들은 나라가 망하자 일본군을 피해 대부분 산으로 들어가 화전민으로 살았다. 그들이 산속에서 해 먹던 메밀국수가 마을에도 전해졌다. 1960년대 후반 화전정리법에 따라 산에서 내려온 화전민들이 춘천 시내로 들어가 생업으로 메밀국수 집을 많이 열면서 춘천이 막국수의 고장이 됐다는 일설이 있다. (『춘천백년사』)
 
“고향 음식 옛맛 그대로 남기고 싶어”
 

러시아 우수리스크 고려인문화센터 앞마당에 있는 의암 유인석 추모비. 박종근 기자

 

가정자 마을의 메밀 음식은 반대기·싹두기·칼국수·콩국수·냉국수 등이었다. 냉국수는 국수틀로 눌러 뽑은 국수를 삶아 찬물에 헹궈 간장국물이나 김칫국물·물김치·동치미에 말았다. 여름엔 콩국물을 더 많이 이용했다. 간장 비빔도 일반적으로 해 먹는 방식이었다. 버섯이 흔한 산골이니 해 먹을 때마다 집에 있는 걸 얹었다. 이런 음식을 옛 맛 그대로 되살리고 싶었다. 집안 내림에 약간 가감해 무삼면옥 레시피를 만들었다. 확실하지 않은 부분은 고모와 큰누나의 증언을 듣고 검증도 받았다. 가장 크게 더한 건 소고기다.
 
국물은 한우 양지·우둔 육수에 표고·영지·상황·인삼·감초·헛개열매·엄나무·겨우살이·둥굴레·무·배·마늘·대파뿌리 달인 물을 섞고 어육간장으로 간을 한다. 간장 비빔에도 쓰는 어육간장은 집안에 전해 오는 방식을 개량했다. 이씨가 종손인 집안에서는 한 해 13차례 모시는 제사와 차례 때마다 쓰고 남은 고기·건어물 적(炙)을 간장독에 담갔다. 19세기 말 서울에서 가정자 마을에 전해져 덕수이씨 집안에서도 담그던 간장이다. 요즘은 소·닭·돼지고기와 말린 민어·도미·조기 등 종류나 양을 훨씬 많이 넣어 어육간장을 만든다. 이 간장은 짜기 때문에 표고버섯 삶은 물을 타서 사용한다.
 
혹평도 아랑곳하지 않는 주인의 일편단심을 물어봤다. 대답에서 집념과 열정이 불꽃처럼 튀었다.
 
“고향에서 먹고 자란 메밀 음식과 호박범벅·호박푸러기(풀떼기)·감자범벅·감자부지(달군 돌로 굽는)·장반대기 같은 음식을 옛날 그대로 만들어 파는 향토음식점을 만들어 남기고 싶다. 이제는 고향에서도 잊히고 있어 아깝고 안타깝다. 인생 살면서 뭔가 하나는 남겨야 하지 않겠는가.” <중앙일보 2021. 4. 3>
 

이택희 음식문화 이야기꾼 hahnon2@naver.com 
전직 신문기자. 기자 시절 먹고 마시고 여행하기를 본업 다음으로 열심히 했다. 2018년 처음 무소속이 돼 자연으로 가는 자유인을 꿈꾸는 자칭 ‘자자처사(自自處士)’로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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