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바이오틱 김보영 대표 인터뷰①
이병한 EARTH+ 대표 | 기사입력 2021.04.16.
부다페스트 역, 기차는 떠났다. 황망하게 길을 잃었다. 새 길을 찾고자 멀리 떠나온 차였다. 본디 외교관이 되고 싶었다. 하루 이틀의 소망이 아니다. 중2때부터 오래 품었던 꿈이다. 외교관이나 장교가 되어 나라에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잠자는 시간을 제하고 하루 15시간씩 공부했다. 그럼에도 한 번, 또 한 번 연거푸 고배를 마셨다. 설상가상으로 외무고시 자체가 폐지되었다. 10년 공든 탑이 허물어지는 순간이었다. 하필 그 무렵에 정서적으로 의지하던 강아지마저 잃어버렸다. 자칫 폐인이 되겠기에 부랴부랴 직장부터 구했다. 학원 영어 강사로 일했다. 그러나 만족스럽지 못했다. 공부를 더 하고 싶었다. 먼저 눈길이 향한 곳이 유럽이다. 국제정치에 관심이 컸기에 EU법도 솔깃했다. 유학 준비와 답사를 겸하여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산티아고를 순례하며 마음을 다스리고 의지를 다지고 싶었다. 비행기 티켓과 유레일 패스만 끊어, 배낭 하나 달랑 메고 유라시아의 서쪽 끝으로 떠났다. 그런데 그것마저 여의치 않았다. 어제도 일찍 떠난 기차가 오늘은 더 일찍 출발한 것이다. 계획해둔 일정이 제대로 헝클어지고 말았다. 심리적으로 힘들어 멀리 떠나온 낯선 나라, 걷고 또 걷느라 이미 엄지발톱 두 개가 다 빠져 양말마저 붉게 물들어 있었다. 이대고 그만 털썩 주저앉고 싶었다. 펑펑 목 놓아 울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바로 그 때 누군가 말을 걸어왔다.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이탈리아 남자였다. 이탈리아는 부러 가지 않으려고 했던 나라였다. 이탈리아 남성들에 대한 소문이 좋지 않았다. 여자 혼자 여행하기에는 어쩐지 꺼림칙한 나라였다. 그런데 그 나라에서 온 젊은 친구였다. 그 또한 기차를 놓쳤다고 한다. 어떻게 할 거냐, 어디로 갈 거냐, 자꾸 귀찮게 말을 걸었다. 엉뚱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타는 속을 달래려고 콜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여태껏 마신 가운데 콜라 가운데 가장 시원하고 상쾌하고 청량한 경험이었다. 기록해 두고자 카메라를 꺼내들어 찍어두었다. 그런데 그 모습을 보더니 '너희 너라는 콜라가 없니?'라고 물어보는 것이다. 잠자고 있던 애국심이 불끈 솟아올랐다. 나 한국 사람이야, 너 한국 몰라? 쏘아붙였다. 그런데 모른단다. 무식한 놈이다. 편의점에 갔더니 이번에는 초콜릿을 사서 건넨다. '이게 초콜릿이야.' 하고 내미는 것이다. 도대체 이 남자는 나를 뭘로 보는 것일까? 탈북이라도 한 것처럼 보이는 걸까? 몰골을 보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런데 북한 또한 모른다고 한다. 아시아에 대해서는 도통 무지한 유럽의 젊은 사내였다.
인문사회에 관심이 덜했던 반면으로 과학과 공학에서는 천재적인 친구였다. 갈릴레오 갈릴레이 과학 고등학교 출신이다. 유럽, 아니 세계 최고의 과고에서 공부했다. 대학도 이탈리아 최고 명문이라 할 수 있는 파도바 국립대학에 다니고 있었다. 방학을 이용해 배낭여행을 다니던 차이다. 어차피 일정도 틀어진 김에 이탈리아의 본인 집으로 초대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과연 이탈리아 남자들은 유난히 밝히는구나, 오해하기 십상이었다. 그런데 짓궂은 미소 너머 눈빛이 한없이 맑았다. 걱정은 하지 마란다. 가족이 함께 사는 집이란다. 산티아고에 갈라치면 제대로 챙겨먹고 깨끗하게 씻고 준비를 잘 해서 가야하지 않겠냐고 설득한다. 차림새가 영 딱해 보였던 모양이다. 그리하여 얼떨결에 이탈리아로 가는 기차를 타게 되었다. 인생의 반려가 되는 여행길이 될지는 미처 예상치 못했을 것이다.
대가족이었다. 부모님만 함께 사는 것이 아니었다. 할머니, 할아버지에 큰형 작은형에 누나 등등 식구가 여럿이었다. 번듯한 집안이기도 했다. 외가로는 변호사가 많았다. 그런데 딱딱한 사무실에서 근무하는 법률가만도 아니었다. 농업 법인을 만들어 사회적 농장을 경영하고 있었다. 할아버지가 설립자였다. 알고 보니 2차 세계 대전을 거치며 폐허가 된 시골마을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한 베네토 주의 아주 유명한 농장이었다. 이 농장에 대한 박물관도 만들어져 있을 정도이다. 농민들이 이렇게 잘 살 수도 있고, 농업이 이렇게 매력적이고 멋있는 일이 될 수 있다는 사실에 처음으로 눈을 뜨는 순간이었다. 주중에는 베니스에서 근무하는 사람들도 주말농장 삼아 많이들 놀러왔다. 농장에서 기른 토마토 소스 파스타에 농장에서 재배한 포도주를 곁들인 근사한 저녁 식사는 과연 일품이었다. 나라 사랑이 유별났던 고로 한국의 농촌과 비교해보게 되었다. 고된 노동으로 시달리고 궁상맞은 살림살이로 피폐해진 어르신들이 절로 떠올랐다. 스마트팜이라고 바가지를 잔뜩 쓰고 손해만 보고 있는 청년 농부들도 떠올랐다. 이탈리아의 사회적 농장을 잘 배워서 한국의 농촌과 농민과 농업을 살릴 수 있지 않을까 궁리하게 되었다. 학원 강사직을 그만두고 농장에서 근무하기로 결심한다. 거처와 직업 모두 단숨에 바뀐 것이다.
훗날 남편이 되는 토스케티 지안 마리아는 탁월한 엔지니어이기도 했다. 발명가의 피를 물려받았다. 아버지는 건축학과 교수로 기계 관련 특허만 수십 개에 달한다. 농장의 지하실은 온갖 공구와 기계설비가 갖추어진 공장이기도 했다. 농업과 공업의 융합을 가업으로 전수받은 셈이다. 이탈리아는 휴가가 길기로 유명하다. 야생의 자연 속에서 오래 시간을 보내는 이들도 많다. 그만큼 조난 사고도 심심찮게 일어난다. 구조견만으로는 충분히 대응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구조견을 대신할 수 있는 로봇을 개발하던 친구였다. 대학생 시절부터 구조로봇의 다리 모듈을 개발하고 있었던 것이다. 밋밋한 공장 바닥이 아니라 험한 산지를 오고갈 수 있는 로봇을 만들려면 특별난 기술과 디자인이 필히 요청되었다. 그 원형이 되는 아이디어를 대학생 시절부터 궁리해왔던 것이다. 그런데 로봇이 정말로 필요한 곳은 한국의 농촌이라는 생각에 이르렀다. 노령화가 한국처럼 급속도로 진행되는 나라가 없다. 인구소멸이 농촌의 자연소멸을 이끌고 있다. 농촌을 되살리기 위해서라도 '인공 농민'이 필요했다. 귀국을 넘어 귀촌까지 하게 된 것이다. 그 이전만 해도 부산과 서울 등 도시서만 살았다. 그런데 이제는 이탈리아 남편과 로봇을 장착하여 산촌에 이르게 됐다. 두 사람을 만난 곳도 강원도 산골짜기였다. 원주에는 로봇을 개발하는 연구소가 있었고, 평창에는 로봇으로 농사를 짓는 농장이 있었다.
출처: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2021041610461115283#0DKU 프레시안(http://www.press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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