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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농업대학 특용작물학과 3학년에 재학 중인 김규봉 씨의 비전은 ‘건강한 먹을거리’ 만들기. 도시에서 나고 자란 그가 ‘생뚱맞게’ 평생 농사를 지으며 살기로 결심한 이유는 뭘까. 농업에 대한 그의 남다른 생각과 살뜰한 애정을 담아봤다.
경기도 화성에 위치한 한국농업대학을 찾아가는 길. 짙은 황사에 희뿌연 안개까지 낀 볼썽사나운 날씨였지만 발걸음이 가벼웠다. ‘잘생긴 김규봉’이란 인터넷 아이디를 쓰는 청년을 만난다는 설렘도 있었고, 어린 나이에 농사에 뜻을 둔 사연도 기대됐다. 김규봉 씨(22)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봄 햇살처럼 따뜻하고 마른 땅을 뚫고 나온 새싹처럼 힘찼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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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을거리 건강해야 삶이 건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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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앞까지 마중 나온 그는 흙이나 쟁기와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앳된 모습이었다. 자리를 잡고 앉자마자 ‘농업은?’하고 물었다. ‘A는 B다’로 답해달라는 주문과 함께. 그에게 농업이 어떤 의미인지 궁금하기도 했고, 왠지 이 대답부터 들어야 얘기가 술술 풀릴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농업은 제 심장이자 우리나라의 심장입니다. 심장은 우리 몸에 피를 공급해주는 없어서는 안 될 장기죠. 심장이 없으면 생명을 유지할 수 없듯이 농업이 없으면 우리가 살아갈 수 없습니다.” 선문답처럼 불쑥 던진 질문에 명쾌한 대답이 돌아왔다. 그가 이렇듯 농업에 확실한 철학이 있는 건 어려서부터 농사에 관심을 가졌기 때문이다. 특수학교 교사인 아버지를 통해 농약이나 환경호르몬이 인간에게 해를 끼치고 장애를 유발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 ‘먹을거리가 건강해야 삶이 건강할 수 있다’는 평범하지만 소중한 진실을 깨달았다고. “아버지가 몸이 불편하거나 지적인 능력이 조금 부족한 발달장애 아이들과 함께 농사를 지었는데, 제가 그 일을 도와드렸어요. 울고불고 떼쓰기만 하던 장애아도 상추를 심고 토마토를 딸 때는 활짝 웃더라고요. 그때 농사가 즐거운 일이란 걸 알았죠.” 텃밭 가꾸기에 재미를 붙인 그는 평소에도 일손이 부족하다 싶으면 동네 친구들을 불러 모았다. 늘 학교 일로 바쁜 부부 교사의 외아들로 자라며 외로움을 느낄 때마다 친구들이 그 빈자리를 채워준 것. 짚에 쇠똥과 닭똥을 섞어서 퇴비를 만들던 작업은 아직도 즐거운 추억으로 남아 있다. “퇴비를 발효시키는 냄새가 얼마나 지독한지 코가 새빨갛게 달아올랐어요. 집에 들어가면 가족이 모두 피할 정도였죠. 지금도 초등학생 때 친구들끼리 모이면 ‘아직도 그 냄새가 생각난다’며 키득거려요.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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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대를 무릅쓰고 선택한 길… ‘학교 역사상 처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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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는 한국농업대학 졸업반이다. 경기도 분당에서 전교 20위권의 성적을 유지하던 모범생이 이름도 생소한 이 학교에 어떻게 입학했을까. 예비 농업인이 되도록 길을 열어준 건 아버지다. 고등학교 3학년 1학기, 아버지가 슬그머니 알려준 대학이 바로 한국농업대학. 일찍부터 농업 쪽으로 진로를 정한 아들을 위해 남몰래 진학 지도를 준비했던 것이다. 처음엔 들어본 적 없는 낯선 이름이라 그냥 피식 웃었다고. 하지만 가끔씩 방에 들러 ‘학생 때는 배우는 게 가장 중요하다’ ‘눈뜨고 있을 때 최선을 다해라’ 한두 마디를 건네는 게 전부인 아버지였기에 고마움이 더 컸다. “다정한 아빠를 둔 친구들이 정말 부러웠어요. 공부도 가르쳐주고 신경도 많이 써 주고. 저희 아버지는 아들이 몇 반인지도 모를 정도로 무심하셨거든요. 하지만 그건 제 착각이었어요. 멀리 있는 것 같으면서도 저에 대해 가장 잘 아는 분이 바로 아버지였답니다.” 사회로 나가는 인생의 첫발을 어디로 내딛느냐는 정말 중요한 선택. 고민 끝에 ‘내 인생은 내가 결정한다’는 생각으로 한국농업대학을 낙점했다. 일반 대학의 농업 관련 학과들을 끝까지 물망에 올렸지만 졸업 후 연구원이 되는 사례가 더 많은 것이 마음에 걸렸다. 책상에 앉아 이론만 가지고는 농사를 지을 수 없다는 게 그의 생각. 간판보다는 향후 농사에 실질적인 도움이 될 수 있는 ‘실리’를 택했다. 1학기 수시 전형에 지원한다고 하자 어머니는 ‘수능 때까지 더 공부해서 신중하게 결정하자’며 반대했다. 학교 선생님들도 ‘왜 그런 학교에 가냐?’ ‘서울에 좋은 대학이 낫지 않냐?’며 놀리거나 무시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그의 ‘단호함’에 모두 협조적인 자세로 돌아섰다. “담임선생님은 제 의견을 진지하게 들어주셨어요. 농담으로 ‘진짜 가냐?’고 되묻기도 하셨지만, 정성 들여 추천서도 써주시고 격려를 아끼지 않으셨죠. 교감 선생님이 원서에 도장을 찍으며 ‘학교 역사상 처음이야. 참 특이하네’ 하셨던 게 기억에 남아요. 농사지으면 재배한 것 좀 보내달라고 하셨는데, 나중에 꼭 가져다 드릴 생각입니다. 하하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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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기농업 이용한 특수 채소로 농업 CEO 발돋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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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생활은 편하고 즐겁습니다. 학교 특성상 학생 연령층이 다양해 가족 같은 분위기에서 수업이 진행되죠. 모르는 내용은 실제로 농사를 지으시는 30~40대 형들께 여쭤보며 많이 배워요.” 농업에 대한 의지가 강한 사람들끼리 모여 자유롭게 토론하고 다양한 생각을 공유할 수 있다고. ‘어떻게 기를 것인가’ ‘얼마에 팔 것인가’와 같은 현실적인 어려움을 함께 고민할 수 있어 든든하다. 특히 학생들이 공들여 키운 작물을 소개, 판매하는 학교 축제는 신기하고 새로운 경험. 반찬거리를 사러 나온 동네 아주머니들과 직접 만나서 채소와 버섯을 판매해본 건 좋은 공부가 됐다. 그는 지난해 10개월간 일본으로 장기 현장 실습을 다녀왔다. 2학년 과정을 일본 홋카이도에서 가장 규모가 큰 농업 회사 카노농장에서 보낸 것. 새벽 5시 30분에 일어나 저녁 7시까지 일하는 ‘고된’ 실습이었다. 밤늦게까지 작업이 계속되는 농번기엔 안 마시던 커피도 마시고, 쉬고 싶은 마음에 비가 왔으면 하고 바라기도 했다. “말도 안 통하고 일도 잘 몰랐기 때문에 적응하기가 무척 힘들었어요. 문화적으로 다른 부분이 많아 혼도 나고 무시도 당했거든요. 할 수 있는 일은 그들보다 일찍 나가서 더 열심히 일하는 것뿐이었습니다.” 살이 쑥 빠질 정도로 힘들었지만 밝게 웃으며 일하기를 여러 달. 직접 파종한 감자와 당근, 사탕무, 옥수수를 수확하면서 말로만 듣던 ‘땀 흘린 보람’이 무엇인지 몸으로 느꼈다. 틈틈이 농장 경영에 대해 연구하고, 많이 물어보고 배운 덕분에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자신에 대한 ‘믿음’이 열매로 돌아왔단다. 요즘은 졸업 후 펼칠 사업을 구상하고 있다. 유기농업을 이용한 특수 채소가 그의 창업 아이템. 음식점이나 호텔 쪽으로 판로를 개척할 구체적인 계획까지 세우며 ‘농업 CEO’로 발돋움하기 위해 호흡을 가다듬고 있다. 그는 “우리 농산물을 사랑할 때 우리 농업이 살아난다는 사실을 꼭 기억해달라”는 당부를 잊지 않았다. 또 농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가장 싫어하는 말이 ‘안 되면 농사나 지어야지’라면서 흙만 파서 농사를 짓는 시대는 지나갔다고 덧붙였다. 농업이야말로 여러 학문이 결합된 종합 과학이라는 게 그의 얘기다. “시기적으로 우리 농업이 참 힘든 때입니다. 더 깨끗하고 안전하고 건강한 농산물을 길러내야 이 힘든 시기를 이겨낼 수 있겠죠. 열심히 배우고 익혀서 꼭 참된 농업인이 될 겁니다.” 대학에서 농업에 대해 제대로 공부하며 농업을 훨씬 더 사랑하게 되었다는 건 그의 진심이다. 더 많은 사람들의 식탁에 건강한 먹을거리를 올리기 위해 정성껏 밭을 일구겠다는 그의 열정은 뜨거웠다. 그는 ‘마음까지 잘생긴’ 김규봉이다.
정연근 기자 ygjung@naeil.com / Copyright ⓒThe Naeil News.2008-01-16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