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我/나의이야기

농업의 슈바이처를 갈망하며

농업의 슈바이처를 갈망하며

 

I don’t know what your destiny will be, but one thing I know : the only ones among

you who will be really happy are those who will have sought and found how to serve.

 

우리의 운명이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지 나는 모른다. 그러나 하나는 안다. 앞으로 진정하게 행복한 삶을 살아갈 사람들은 남에게 봉사하는 방법을 발견하고 찾는 사람들이다. - 알버트 슈바이처(1875~1965) : 독일 선교사, 의사, 음악가, 신학자 -

 

 ‘밀림의 성자’, ‘검은 대륙의 성자’… 일생을 아프리카에 머물면서 그야말로 인술(仁術)을 편 알버트 슈바이처(Albert Schweitzer) 박사에 따라붙는 말들입니다. 또 ‘생명의 외경(畏敬)’이라는 말도 슈바이처 박사만의 독특한 브랜드로 붙여진 이름입니다. 평생 봉사와 헌신으로 보낸 슈바이처의 일생에 대해서는 굳이 설명이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지금 우리 시대가 농업의 슈바이처를 갈망하고 있습니다. 

 

1896년 어느 청명한 여름날 아침, 나는 귄스바흐에서 눈을 떴다. 그날은 성신 강림절이었다. 이때 문득 이러한 행복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여기에 대해 나도 무엇인가를 베풀어야만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이러한 생각과 씨름을 하는 동안 바깥에서는 새들이 지저귀고 있었는데,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기 전에 조용히 생각해본 끝에 서른 살까지는 학문과 예술을 위해서 살고, 그 이후부터는 인류에 직접 봉사하기로 마음을 정했다.

1915년 여름이 시작될 무렵 나는 마취상태에서 깨어나듯 눈을 떴다. 어째서 문화에 대해 비판만 할 것인가? 어째서 우리를 아류라고 분석하는 것만으로 만족할 것인가? 어째서 재건작업은 하려 들지 않는가? 이 문제에 관해 연구하는 동안 문화와 세계관의 관계도 분명해졌다. 나는 문화의 파국이 세계관의 파국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참된 문화의 이상은 그것이 뿌리박고 있고 이상주의적 세계관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에 무력해지고 말았다. 민족이나 인류의 모든 사건은 그들의 세계관 속에 주어진 정신적 원인에서 비롯된다.

 

그렇다면 문화란 무엇인가?
문화의 본질이라면 우선 개인이나 사회의 윤리적 완성을 들 수 있다. 그와 동시에 모든 정신적 물질적 진보도 문화적 의의를 지닌다. 그러므로 문화에 대한 의지는 윤리적인 것을 최고의 가치로 의식하는 보편적인 진보 의지이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지식과 능력이 이룩해놓은 업적이 아무리 중요하다 하더라도 인류는 윤리적 목표를 향해 나아갈 때에만 물질적 진보의 혜택을 충분히 누릴 수 있고 또 거기에 수반되는 위험을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 이 혼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우리가 다시 문화 세계관을 통하여 그 속에 내포되어 있는 진정한 문화의 이상의 지배 하에 들어가는 길밖에 없다.
그렇다면 보편적 의지와 윤리적 의지의 밑바탕이 되며, 또 이 양자를 결합시켜주는 세계관이란 어떤 것인가? 그것은 “윤리적 세계 긍정 및 인생 긍정”이다.

“나는 살려고 하는, 생명에 둘러싸여 살려고 하는 생명이다.”

사람들이 생에 대한 외경심의 윤리에 대해 특히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은 이 윤리가 고귀한 생명과 미천한 생명, 가치 있는 생명과 가치 없는 생명을 구별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거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생명체 사이에 보편타당한 가치 구분을 설정하려면 결국 우리들의 감정에 따라 어떤 생명은 우리들에게 가깝고 어떤 생명은 멀다고 판단하게 마련인데, 이것은 전적으로 주관적인 척도에 불과하다. 다른 생명체가 그 자체로, 그리고 우주 속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아는 사람은 우리들 가운데 아무도 없다.

인류는 사고와 사고에서 유래하는 이상을 포기함으로써 정신적 또는 물질적 곤궁에 빠졌다. 나는 이 곤궁이 최대한도로 확대된 모습을 그려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낙관적이다.. 진리에서 오는 정신은 환경의 힘보다 강하다는 것이 나의 신념이다. 인류가 자신의 성향에 따라 마련하는 운명 외에 어떠한 운명도 인류를 기다리고 있지 않다는 것이 나의 견해이다. 그러므로 인류가 몰락의 길을 끝까지 걸어갈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나의 내부에서 빛이 꺼지지 않도록 노력하는 일이다. 안에 빛이 있으면 스스로 밖이 빛나는 법이다. 나무에는 해마다 같은 열매가 달리지만 실은 그것은 매번 새로운 열매다. 마찬가지로 사색에 있어서도 모든 항구적인 가치있는 사상이 늘 새롭게 나타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현대인들은 회의주의라는 열매맺지 못하는 나뭇가지에 진리의 열매를 매달고 익혀 보려고 애쓴다.

 

독서는 단지 지식의 재료를 공급할 뿐이다. 그것을 자기의 것으로 만드는 것은 사색의 힘이다. 사색하는 것을 포기하는 것은 정신적 파산 선고와 같은 것이다. 삶을 바라보는 인간의 방식은 그의 운명을 결정한다. 당신은 당신의 동료들을 위하여 잠시라도 시간을 할애해야 한다. 비록 작은 것이라고 해도, 당신은 남들을 위하여 어떤 것을 해야 한다. 그것은 당신에게 돈을 안겨주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당신의 자존심을 강화시켜 주는 것이다.

 

생생한 진리는 인간 사색에 의하여 산출된 것뿐이다. 어린 시절의 이상주의 가운데에서 인간의 진리가 발견될 수 있으며, 어린 시절의 이상주의야말로 이 세상의 아무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인간의 부(富)이다.

 

우리들 성인(成人)들이 청년들에게 가르쳐야 할 처세에 대한 지식은 현실을 너희들의 이상(理想)에 살아야 하며 생활에 뺏기지 않도록 하라는 것이다.

 

이상(理想)의 힘은 계산할 수가 없는 것이다. 우리는 떨어지는 물방울에서는 힘을 볼 수가 없다. 그러나 그것이 바위틈 속으로 들어가서 얼어 붙는다면 그것은 바위를 파괴시킨다. 물은 증기가 되면 가장 강한 엔진들의 피스톤을 움직인다. 이처럼 아이디어 속에는 막강한 힘이 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비극적인 삶이란 살아 있는 동안 인간의 정신이 죽어 있는 삶을 이른다. 인간의 미래는 인간의 마음에 있다. 원자력 전쟁에서는 승자가 없다. 있는 것은 패자뿐이다. 행위의 영웅이란 없다. 다만 체념과 고뇌와의 영웅이 있을 뿐이다.

 

나의 생애와 사상에서  알버트 슈바이처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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