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치가 없으면 안전도 없다
보이고 들리는 게 온통 언짢고 마뜩잖은 것들뿐입니다. 비위가 상하다 못해 뒤틀리는 걸 피하려면 귀 막고 눈 감고 살아야 할 지경입니다 말 안 해도 무슨 소린지 아실 겁니다. 이 땅에서 잘나간다는 사람들 하는 짓이 눈 뜨고 못 보고, 귀 열고 못 들을 정도가 됐다는 거지요. 법을 만드는 의원들이 법을 어긴 동료들에게 면죄부를 주는 것도 모자라 아예 위법을 합법으로 바꾸는 꼼수를 마다하지 않습니다. 법을 수호해야 할 판사는 관할지역의 영주가 돼 각종 이권을 측근들과 나눠먹습니다. 애송이 사법연수생들도 녹 먹는 공무원인 줄 모르고 법보다 제 밥그릇 지키기가 우선입니다. 얼빠진 외교관들은 곱지도 않은 치마폭에서 놀아나다 망신을 당하고 국가기밀을 내줬습니다. 이런 잘못을 나무라야 할 종교 지도자들조차 자기 이익 좇아 국가와 정부를 협박하면서도 잘못을 모릅니다.
이런 게 다 뭘까요. 한마디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모두 염치(廉恥)가 없는 까닭입니다. 염치란 부끄러워할 줄 아는 마음입니다. 부끄러운 줄 모르니 몰염치하고 파렴치한 짓을 거리낌없이 할 수 있는 겁니다. 그처럼 힘은 있으되 염치는 없는 개인들이 모인 사회가 바로 설 수 있을까요. 보십시오.
“예의염치(禮義廉恥)는 나라의 네 벼리입니다. 이 벼리가 펼쳐지면 인심이 깨끗하고 정치가 맑아서 나라를 밝고 창성하게 이끌어 올리고, 벼리가 늘어지면 인심이 더러워지고 정치가 타락해 나라를 어둠 속으로 떨어뜨립니다. 예의는 사람을 다스리는 큰 법이 되고, 염치는 사람을 바로잡는 큰 절개로서 국가 정치의 요체가 됩니다. 예의를 준수하고 염치를 소중하게 여기는 자는 안녕과 영화를 보전해 그 아름다운 이름을 후세에 전할 것이요, 예의를 포기하고 염치를 저버리는 자는 마침내 재앙과 패망에 빠져 더러운 냄새가 만대에 흐를 것입니다.”
세종실록 29년 5월 22일자에 보이는 사헌부의 상소문입니다. 벼리는 네모난 그물의 모서리 줄을 말합니다. 네 벼리를 모두 당겨야 그물이 펼쳐지겠죠? 예절과 곧음, 청렴함, 부끄러워함 이 네 가지가 이 나라를 지탱하고 정치를 바로 펼치는 요체라는 얘깁니다. 내친김에 좀 더 볼까요. 이 예의염치는 사실 국산 철학이 아닙니다. 관포지교(管鮑之交)로 명성을 날린 관중이 우리 사헌부보다 1300년 전에 한 말이지요. 그는 예의염치를 나라를 당겨 세우는 네 가지 줄로 꼽았습니다. 이른바 사유(四維)인데 그중 하나가 없으면 나라가 기울어지고, 둘이 없으면 위태로워지며, 셋이 없으면 뒤집어지고, 모두 없으면 나라가 파멸을 면치 못한다고 했습니다. 역시 예의염치가 국가를 지탱하는 기둥이라 본 겁니다.
이후 세월이 흐르면서 사유에 효제충신(孝悌忠信)이 보태져 팔덕(八德)이 됩니다. 앞의 네 가지가 나라를 떠받치는 데 필요한 덕목이라면, 뒤의 네 가지는 인간관계에서 지켜야 할 필수 덕목이라는 거지요. 그래서 중국에서는 이 팔덕이 없는 사람을 ‘왕빠(忘八)’라 부르며 사람 취급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같은 발음이면서 ‘오쟁이 진 남편’을 뜻하는 왕빠(王八)만큼이나 심한 욕인 거죠.
그런데 유의해서 볼 게 있습니다. 충성을 개인적인 덕목으로 본 반면, 염치를 국가적인 덕목으로 봤다는 거지요. 군신관계가 철저했던 왕조시대조차 국가를 유지하는 데 충성보다 염치를 우선적인 가치로 삼고 있는 겁니다. 돌려 말하면 국가경영에 직접 참여하는 사람일수록 수치를 알아야 하고, 염치 없는 사람이 충성만 하는 것만큼 국가 기틀을 흔드는 것도 없다는 뜻입니다.
염치를 중요시하는 건 동양뿐만이 아닙니다. 호메로스는 『일리아드』에서 말합니다. “수치를 아는 사람들은 구원되는 자가 많다. 하지만 수치를 모르는 자들에게는 명예도 안전도 없다.” 탈무드 역시 유대인들에게 이렇게 가르칩니다. “인간이 갖고 있는 유일한 가치는 부끄러움을 아는 것이다. 창피함을 아는 사람은 쉬이 죄악에 떨어지지 않는다.” 전쟁이 일상이던 사회건, 종교가 삶 자체인 사회건 염치가 받쳐주지 않으면 유지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염치가 없는 사람은 자신만이 아니라 사회와 국가를 망친다는 걸 잊지 마십시오. 혼자 염치를 차리느라 손해본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눈 감고 귀 막아야 할 패악에도 이 나라가 망하지 않고 굴러가는 건, 그보다 많은 사람이 자기 자리에서 염치를 살피며 일하고 있는 까닭입니다. 그들은 지금 이 시간 남들이 대수롭지 않게 생각할 수 있는 일도 스스로 부끄러워하며 삼가고 있습니다.
이훈범 중앙일보 j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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