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我/좋은글모심

가까운 사람부터 가까이 하자

가까운 사람부터 가까이 하자

 

 

 

 

 

 

 지난해 말 한 권, 며칠 전에 또 한 권. 배달된 책들은 공교롭게도 먼저 세상을 뜬 아내에 대한 절절한 미안함과 그리움이 담긴 시집이었다. 한 저자는 개인적으로 아는 분이고, 다른 이는 언론계 선배였다. 읽으면서 몇 번이나 눈시울이 시큰해졌다.

 한국고전번역원의 정선용(55) 수석연구위원은 지난해 6월 중학교 교감선생님이던 부인을 교통사고로 잃었다. 경기도 시화호에서 동료들과 사진촬영을 하는데 브레이크가 고장난 유조차가 일행을 덮쳤다. 정씨는 “나중에 내 사진과 당신의 시를 모아 책을 만들어 우리를 아는 사람들에게 보이자”던 아내의 말을 기억해 냈다. 30년간 한문 사료·문집들을 번역한 내공을 쥐어짜 먼저 간 아내를 그리는 조상들의 한시를 우리 글로 옮겼다. 부인이 남긴 사진을 함께 담아 『외로운 밤 찬 서재서 당신 그리오』라고 제목을 붙였다. 서문을 빌려 “남의 일로만 알았던 뜻밖의 이별, 당해 보니 참으로 아프다”고 고백했다.

 ‘모든 일에 멍하여서 백치가 된 듯하고/ 죽은 당신 생각하면 아직도 안 믿기오/ 당신의 가난과 병 모두 내 탓인데/ 거품 지듯 갑자기 떠나갈 줄 몰랐다오’(조지겸, 1639~1685). ‘나의 죄가 쌓이어서 당신 죽게 하였거니/ 눈이 쌓인 무덤에서 홀로 눈물 떨군다오’(오원, 1700~1740). ‘내세에는 당신과 나 처지 바꿔 태어나랴/ 나는 죽고 당신 살아 천리 밖에 와 있으면/ 이내 마음 이내 슬픔 당신도 다 알 것이리’(김정희, 1786~1856).

 문화방송 기자로 오래 근무한 김상기(66)씨도 2007년 8월 아내를 먼저 보냈다. 5년간의 암 투병 후였다. 홀로 되고 4년 동안 쓴 시를 모아 지난해 말 시집 『아내의 묘비명』을 냈다. 후회, 그리움, 고통으로 가득하다. ‘시간이 있을 줄 알았다/ 실점을 만회할 시간/ 잘못을 돌이킬 수 있는 시간… 내가 얼어 죽을 직장을 그만두고/ 일 핑계로 잊고 산 가족을 돌아볼 시간이/ 적어도 일이십 년은 더 주어질 줄 알았다…’(‘시간이 있을 줄 알았다’). ‘목숨이 백 년은/ 푸르를 줄 알았다/ 사랑은 천 년도/ 짧을 것만 같았다…’(‘연가’)는 김씨는 끝내 “내가 다시 사랑을 노래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라고 자백하듯 실토한다.

 웅장한 시야나 고담준론(高談峻論)들이 문득 공허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가장 가까운 곳부터 살피고 보듬으라는 내면의 소리 덕분이다. 친한 이들과 대화하는 자리에서도 수시로 스마트폰을 꺼내 먼 곳 사람들과 메시지를 주고받는 세상이다. 물리적인 원근감(遠近感)을 뛰어넘었으니 우리는 더 행복해졌는가. 적어도 가정, 부부에는 아닌 것 같다. 짝을 잃은 황망함은 400년 전이나 현재나 똑같다. 지금, 가장 가까운 사람부터 챙길 일이다. 시간이 더 있을 줄 알았다고 후회하기 전에.


노재현 논설위원·문화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