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은 왜, 어떻게 필까
◆ 꽃에 숨은 생존의 법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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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방이 온통 꽃천지다. 하나 둘 얼굴을 내미는가 싶던 개나리는 약속이나 한 듯 일제히 노란 물결을 이루었다. 모처럼 가족과 함께 손을 잡고 꽃 길 아래를 거닐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 만하다. 저 나무들은 도대체 봄이 온 걸 어떻게 알고 꽃을 피울까. 그것도 정확하게 때를 맞추어 한꺼번에 말이다.
봄에 꽃을 피우는 식물들은 대개 길어진 낮의 길이와 높아진 기온으로 개화 시기를 알아차린다. 한편 국화나 벼 등 가을에 꽃이 피는 식물은 낮의 길이가 짧아지는 것을 보고서야 꽃을 피운다. 그럼 식물마다 왜 이처럼 꽃이 피는 시기가 다른 걸까?
그걸 이해하기 위해선 먼저 식물이 꽃을 왜 피우는지 알아야 한다. 꽃은 식물에게 있어서 아주 중요한 생존수단이다. 꽃이 피어야 그 안에 들어 있는 암술과 수술의 수정이 가능하고, 씨라는 자손을 남길 수 있다.
똑같이 꽃을 피워도 스스로 수정이 가능한가 그렇지 않은가에 따라서 구분이 된다. 하나의 꽃 안에 있는 암술과 수술 사이에서 수정이 이루어지는 것을 ‘자화 수분(自花受粉)’이라 한다. 반대로 ‘타화수분(他花受粉)’은 한 개체 안에 피어 있는 서로 다른 꽃 사이에서 수정이 이루어진다.
다양성을 늘릴 수 있다는 진화적 관점에서 볼 때, 타화 수분 식물이 더 생존에 유리하다. 마치 예전부터 친인척끼리의 결혼을 금기시해왔던 인간 사회의 이치와 같다.
자화 수분과 타화 수분의 차이는 꽃의 아름다움에도 영향을 미친다. 자화 수분을 하는 식물은 꽃만 피면 새나 곤충의 도움없이도 자기 스스로 수정이 가능하다. 따라서 꽃이 작고 볼품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타화 수분을 하는 꽃은 암술과 수술 사이를 오가며 중매쟁이 역할을 해주는 새나 곤충의 도움이 필요하다.
이들 ‘중매쟁이’를 유혹하기 위해서는 꽃이 크고 예쁘며 좋은 향기를 지녀야 한다.
따라서 타화 수분을 하는 식물들은 꽃을 피울 때 스스로 새나 곤충의 활동 시기를 고려한다. 자기의 수정을 도와주는 ‘중매쟁이’들의 활동이 가장 왕성할 때 꽃을 피워야만 번식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꽃은 자기가 생존할 수 있는 가장 좋은 환경을 선택해 핀다. 하지만 외부 환경의 감지 없이 내재된 자기 프로그램에 의해 꽃을 피우는 식물도 있다. 담배는 심은 후 5~6개월의 일정 기간이 지나면 연중 어느 때고 꽃을 피운다. 이런 식물은 무엇을 기준으로 꽃을 피우는지 아직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아마도 개화에 필요한 호르몬이 계속 쌓여 어느 일정치를 넘으면 꽃이 피는 것으로 추정할 뿐이다.
◆ 유전자로 푸는 개화의 비밀개화의 비밀을 유전자 차원에서 풀기 위해 과학자들은 많은 연구를 하고 있다. 우선 그들이 연구의 대상으로 선택한 것은 애기장대라는 잡초. 애기장대는 식물의 분류학상 최고로 진화한 시스템으로 인정받는 현화식물(꽃을 피우는 식물)이면서도, 안에 담겨진 게놈 정보의 수가 적다.
이것은 불필요한 유전자 정보가 별로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러나 사람의 20분의1 정도에 불과한 애기장대의 염기서열을 전 세계의 과학자들이 힘을 합쳐 분석하는 데 꼬박 10년이란 시간이 걸렸다.
지난 2000년에 발표된 2만 7000여개의 애기장대 유전자 가운데 기능이 밝혀진 것은 지금까지 2000개 정도에 불과하다. 그중 가장 관심이 모아진 것은 당연히 개화시기 관련 유전자의 규명이다.
연구 결과, 애기장대가 꽃을 피우는 경로는 크게 네 가지 요소가 결정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첫째 광주기(밤과 낮의 길이), 둘째 생장 온도, 셋째 춘화(春化·일정 기간의 저온에 노출되어야 꽃을 피우는 생물학적 과정), 넷째 식물 호르몬의 양이다.
아주 작은 식물임에도 불구하고, 애기장대는 개화시기를 조절하는 경로가 서로 복잡한 네트워크로 얽혀있다. 즉, 자기가 주변 여건을 감지할 수 있는 수단을 모두 동원한 뒤, 꽃을 피운다는 이야기이다. 이는 꽃을 피우는 것이 식물에게 있어서는 살아남느냐 죽느냐 하는 문제와 직결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애기장대는 낮이 길어지면 꽃이 피는 장일식물로 알려져있다. 과학적으로 말하면 광수용체에서 빛의 양과 강도 등을 체크해 그 정보를 개화시기 조절 유전자에게 전달해 꽃을 피우는 것이다.
그러나 항상 그늘진 곳에서 자라난 애기장대는 광수용체가 빛의 정보를 읽을 수 없다. 그럼 이런 개체는 봄이 되어도 꽃을 피우지 못하는 걸까? 그렇지 않다. 애기장대는 이같은 경우를 대비해 광주기뿐만 아니라 생장온도와 춘화, 식물 호르몬 등 개화시기를 알아차릴 수 있는 다양한 경로를 준비해놓고 있다.
이같은 장치 덕에, 애기장대는 겨울에 일시적으로 기온이 올라가도 다른 감지 장치가 작동하지 않으면 꽃을 피우지 않게 된다. 다만 개나리의 경우 가끔 한겨울의 따뜻한 날씨에 꽃망울을 터뜨리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개나리의 감지 시스템이 온도에만 주로 의존하는 편이기 때문이다.
서정주 시인은 ‘국화 옆에서’라는 시에서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라고 노래했다. 어쩌면 시인은 눈치 채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식물들은 한 송이 꽃을 피우기 위해 소쩍새의 울음소리보다 더 많은 것에 대해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는 사실을.
(안지훈 교수·고려대 생명과학대학 교수·고려대 식물신호네트워크연구센터 부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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