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우은숙
우리 집 창고엔 어둠을 덮고 누운
자잘한 것들이 살 부비며 살고 있다
모종삽, 낡은 소쿠리, 녹슨 호미, 괭이까지
그뿐인가 봉숭아, 맨드라미, 국화꽃
무, 배추, 오이, 호박, 붉은 홍화 씨앗까지
모두 다 어둠으로만 제 몸을 감싸고 있다
천지간 잔멀미로 울렁이는 전갈 받았나
서로의 몸 흔들며 하나둘 깨어난다
작은 발 꼼지락거리며 수런대는 저 생명들
기억보다 몸이 먼저 알아낸 빠른 감각
겨우내 끌고 온 침묵의 흙 앞에서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봄,
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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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시를 찬찬히 세 번 읽고 나서 눈을 감아 본다. 나는 한 마리 거미가 되어 총총, 고요가 삼키는 은빛 물길을 따라 유년의 수채화를 그린다. 마당 넓은 집 한 채가 보이고, 수건을 두른 내 어머니일 것 같은 아낙과 아버지를 닮은 농부가 보인다. 수건을 두른 아낙이 하시는 말씀 “얘야 ‘도장(곳간 또는 농기구 창고)에 가서 밥하게 쌀 한 됫박 퍼 와라.” 아이는 쌀밥 먹을 생각에 박 바가지로 흰쌀을 고봉으로 퍼온다. 수건을 두른 아낙이 무쇠솥 한가득 밥을 지어 옻칠밥상에 내오신다. 그 밥상을 아이 앞에 놓는 순간 마술처럼 사라지는 아낙이여. 또 농부가 ‘펑!’ 하고 나타나 “얘야 ‘도장’에 가서 무, 배추, 상추씨 좀 가져와라 그리고 고추모종도 심게 호미와 삽도 가져와라.” 아이는 또 만평의 땅을 얻은 듯 기쁜 마음으로 ‘도장’으로 뛰듯이 걸어 간다. 이랑마다 씨 다 뿌려놓고는 그 농부도 마술처럼 사라진다. 혼자 남은 아이는 파란대문 밖 좁은 골목 담 아래 모종삽을 들고 그리움과 기다림의 꽃(봉숭아, 채송화, 맨드라미, 국화 등)을 심는다. ‘기억보다 몸이 먼저 알아낸 빠른 감각’으로 노래한 시인의 손가락에 봉숭아 꽃물 들여 놓고 감은 눈을 뜬다. 어둠 속 씨앗들이 밀어 올린 세상은 모두, 푸름과 온갖 환한 색채들의 축제장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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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은숙 시인의 시조를 앞에 놓고 그리움의 강을 건너 왔다. 궁핍한 과거의 페이지마다 새 크레파스로 환하게 색칠하고 나올 수 있었던, 눈 한 번 감은 짧은 시간이나마 마음의 허기를 달래 준 우은숙 시인의 시조에 대한 감사를 표하고 싶다. 내 심장에서 뿜어내는 동맥과 정맥의 혈류가 실핏줄 끝에서 파르르 떨리는 전율을 일으킨다. 눈꼬리가 떨릴 만큼 지상에 고개 내민 봄을 비벼 먹는다. 봄을 비벼 먹은 내 몸과 영혼은, 또 어느 누구에게 희망을 불어넣어 줄 속이 꽉 찬 씨종자가 되겠는가. 신선한 생각으로 시詩밥을 짓는 우은숙 시인의 밝은 미소가 이슬을 털어내는 새싹의 출렁임 같다. 말 안 해도 마음을 풍요롭게 하는 그의 시상詩想에 박수를 보낸다.
우은숙 시인의 두 번째 시조집 『물무늬를 읽다』을 가만 읽고 있노라면, 내 잃어버린 서정을 잉태하는데 도움을 준다. 「바람의 행보」「곁눈질」「물렁한 힘」「슬그머니」「술잔에 불을 채워」「빈 우물」「물무늬를 읽다」「바다 파는 아낙」「흐름의 시학」「자모」등이 움츠린 서정의 어깨를 토닥여 준다. 몸의 솜털을 살짝 흔들고 지나는 바람이, 허공에 별 한줌 뿌려 놓는다. 유월은 더 뜨거운 여름을 키우기 위해 내공을 쌓는다. 그의 시집에 수록된 시조 「술잔에 불을 채워」를 한 편 더 소개하면서 나무그늘이 그리운 여름으로 독자와 함께 간다.
술잔에 불을 채워
키 작은 게르* 주인 잔에다 불 따른다
태양과 가슴과 붉은 불꽃 하나라며
사람들, 마음을 연다, 햇살을 받는다
지평선을 달려온 청록색 호각 소리
주름진 습곡 건너 정오에 당도하자
보드카 높이 든 손엔 함성이 솟는다
술잔에 넘치는 불 소통의 꽃이다
허공에 걸린 시간 땅으로 내리기 전
불꽃은 초원을 달려 내 심장에 닿는다
*게르 : 몽골인들의 이동식 천막 집.
우은숙 시인은 강원도 정선에서 출생하여 1998년<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으로 문단활동을 시작했다.
시조집 『마른꽃』『물무늬를 읽다』등이 있으며, 제26회 중앙일보시조대상 신인상을 수상했다.
현재 한국시조시인협회 이사, 오늘의시조시인회의 회원, ‘역류’동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임성구의 시조바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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