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휘소 드림
1960년대 초 펜실베이니아 고등연구원 시절,동료들이 붙여준 그의 별명은 '팬티가 썩은 사람'이었다. 저녁 식사나 술자리 같은 사적 모임에 일절 참석하지 않고 밤낮없이 연구실에만 붙어 있어 생긴 별명이었다. 이처럼 사실에 기초한 최초의 평전을 강주상이 썼다는 의미는 남다르다. 이휘소가 강주상의 미국 스토니브룩 대학 시절 박사학위 논문 지도교수였다는 친분외에도 같은 물리학자로서 이휘소의 업적을 일반인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1976년 노벨상 수상자인 리히터와 팅,79년 수상자인 와인버그와 살람,99년의 토프트와 벨트만,2004년 그로스,윌첵 등의 영광이 이휘소 박사의 연구 결과에 직간접적으로 빚을 지고 있음도 논증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저자가 공을 들인 부분은 문학적 상상력에 의해 덧칠된 이휘소의 맨 얼굴이었다.
1971년 한국과학원 부원장이던 정근모 박사가 고국에서 하계 물리학교를 열자는 제의에 이휘소는 이런 답신을 보냈다. "한편으로는 한국의 과학발전을 위하여 조그만 도움이라도 되고 싶지만,다른 한편으로는 민주주의의 원칙을 무시하는 처사들에 실망되어 반대의사를 분명히 밝히고 싶습니다. 하계 대학원의 책임을 맡게 된다면 세인의 눈에 사실과 다르게 내가 한국의 현 정권과 그 억압 정책을 지지하는 것으로 비칠까 걱정됩니다."
이휘소가 잠시 귀국한 것은 2년 뒤인 1974년이었다. AID 차관 평가단의 일원으로 20년만에 한국땅을 밟았으나 공인이라는 신분을 의식해 가족에게 마중도 나오지 말라고 당부했다. 그는 1977년 6월 16일 오후 1시쯤 페르미 연구소 자문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콜로라도로 가던 중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중국계 부인 심만청과 두 자식도 함께 타고 있었으나 다행히 경상이었다. 영결식에서 윌슨 페르미연구소장은 이렇게 고인을 추모했다. "이휘소가 다빈치나 아인슈타인과 같은 인물이라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지만,이들은 특별한 영감을 가진 사람들이었고 새로운 패러다임을 창출하였습니다. 이휘소는 근대의 이론 물리학자 20인을 거명한다면 반드시 포함시켜야할 인물입니다." 이휘소의 생애는 소설에 의해 미화되고 허구로 덧칠하지 않아도 충분히 극적이고 아름다웠다.
'詩 > 한국인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철학이 삶을 묻다 (0) | 2020.03.20 |
---|---|
65세에서 75세가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시절 (0) | 2015.08.02 |
큰 불행이 낳은 사랑 (0) | 2010.08.20 |
달래 마늘의 향기 ③ (0) | 2009.04.30 |
달래 마늘의 향기 ② (0) | 2009.04.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