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업 강소국 네덜란드의 비결
2019.06.24 조선일보
"이곳에선 농부의 감(感)으로 '적당히' 하는 건 하나도 없습니다."
지난 4일(현지 시각) 찾아간 네덜란드 북부 미덴메이르의 유리 온실 단지 '아흐리포르트 A7'에선 일조량부터 파종, 관수(灌水), 병충해 관리까지 모든 것이 자동화되어 있었다. 여의도 면적 1.5배(450만㎡) 단지 내에선 2m를 훌쩍 넘는 파프리카 줄기 사이로 컴퓨터가 운전하는 카트가 분주히 오갔다. 카트는 잘 익은 파프리카 열매가 있는 곳에 멈춰 섰다. 사람이 하는 일은 가위로 파프리카를 따서 담는 것이 전부였다. 중앙관제실에선 파프리카 생장에 최적화된 온습도뿐만 아니라 산소와 이산화탄소 비율도 자동 조절했다. 온실 난방은 단지 내 지열발전소에서 생산한 전기로, 물은 온실 밖 대형 저수조에서 받은 빗물로 해결했다. 공동 농장주 페트라 바렌세(Barendse)씨는 "앞으로 완전 자동화된 AI(인공지능) 온실을 만드는 것이 목표"라고 했다.
◇생존 위한 경쟁이 첨단 농업 일궜다
네덜란드 농업은 개별 농장 규모에서 한국을 압도한다. 네덜란드 농가의 평균 경지 면적(28만㎡)은 한국 농가(1만5000㎡·2015년 기준)의 19배에 달한다. 반면 농가 수는 6만5000여 호로 한국의 16분의 1 정도다.
네덜란드 농업이 원래 이랬던 것은 아니다. 1947년 기준 네덜란드 농가 수는 40만 호, 농민은 75만명이었다. 당시 기아를 해결해야 할 처지였던 네덜란드는 농업 선진화를 위한 '랜드 콘솔리데이션(land consolidation·농지 통합)' 정책을 폈다. 농지를 사들여 규모를 키우고 첨단 설비를 도입하는 농부에겐 보조금을 지급했고, 농사를 포기하고 도시로 떠나는 이들에겐 토지를 적정 가격에 쉽게 팔 수 있도록 지원했다. 60여 년간 일관된 정책을 펼친 결과 현재 네덜란드의 개별 농가는 '농업 기업'에 가깝게 커졌다. 대부분의 농장은 첨단 기술을 적용한 '스마트 농장'으로 진화했다.
◇농업 관련 기술도 세계 최고
농업의 대형·첨단화는 관련 산업의 발전도 촉발했다. 네덜란드 남부 패닝엔의 축사 제조업체 팬콤(Fancom)은 사육부터 출하까지 완전히 자동화된 축사를 연구하고 개발한다. 3일 방문한 팬콤의 연구센터에선 천장에 설치된 적외선 카메라가 돼지의 부피를 알아서 측정한 뒤 무게를 추산해 기록하고 있었다. 환기시스템은 축사 내부의 온습도에 따라 환기를 자동으로 조절했다. 심지어 사료통에는 각각의 돼지를 구분해 사료를 주는 첨단 센서가 달려 있었다. 몇몇 힘센 돼지가 사료를 독점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다. 마크 얀센(Janssen) 판매담당 디렉터는 "우리 기술로 시베리아와 두바이처럼 춥고 더운 곳에도 양돈·양계장을 지을 수 있었다"며 "농민이 축사에 들어가는 횟수가 줄어 전염병 발생도 크게 준다"고 했다. 네덜란드의 축산 농가 4000여 호 중 절반가량이 이 업체의 첨단 축사 시스템을 쓴다.
팬콤은 최근 네덜란드의 농업 연구를 이끄는 바헤닝언대 학연구소(WUR)로부터 '빅데이터 구축 업체'로 선정됐다. 농가들부터 돼지와 닭의 생육(生肉) 데이터를 모아 어떤 환경에서 가장 우수한 품질의 닭·돼지고기가 생산되는지를 연구한다. 얀센 디렉터는 "축적된 빅데이터를 분석해 스스로 닭·소·돼지를 키우는 'AI 농부'가 탄생할 날이 머지않았다"면서 "네덜란드는 'AI 농업' 시대로 들어가기 직전"이라고 말했다
"농업은 산업입니다. 복지사업이 아닙니다."
강호진 주한 네덜란드 대사관 농무관은 "네덜란드가 세계 2위 농식품 수출국이 될 수 있었던 비결은 생산성과 품질을 끌어올리려 애쓰는 농민을 지원하고 육성했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강 농무관은 "농업의 대형화가 전제되지 않은 상태에서 한국 정부가 '스마트팜' 육성을 추진하는 것은 배가 아닌 배꼽을 키우는 격"이라고 했다. 네덜란드의 경우 경쟁을 위해 스마트팜이 필요해졌고, 첨단 온실·축사 등을 지어주는 업체와 같은 배후 산업이 자연히 발달했다는 것이다. 그는 "네덜란드 정부는 이 과정에서 농업을 포기하는 이들은 쉽게 땅을 매각하고 다른 살길을 찾을 수 있도록 '출구전략'을 마련해 줬다"면서 "한국도 농업 경쟁력을 끌어올리는 과정에서 농업을 그만두는 농민들이 먹고살 수 있는 일을 찾도록 하는 방안을 모색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네덜란드 동부 소도시 바헤닝언(Wageningen)은 바헤닝언대학연구센터(WUR)를 중심으로 네슬레·다농·하인즈·유니레버 같은 세계적인 농식품 기업들이 집결한 네덜란드 농업의 심장이다. 반경 50㎞ 안에 있는 농식품 기업의 수만 1500여 개다. 연구기관을 둘러싸고 농식품 기업들이 모여들자 네덜란드 정부는 2004년 이곳을 '푸드밸리'라는 식품산업 클러스터로 지정했다. 푸드밸리의 전체 기업 매출은 연평균 480억유로(약 64조원)로, 네덜란드 GDP의 10%에 달한다.
기업들이 모여든 이유는 농업 부문 세계 1위 대학(대학평가기관 QS 기준)인 바헤닝언대학 때문이다. 우수한 청년들이 모여 혁신적인 연구를 하니 기업들이 찾아오고, 기업들이 모이니 연구도 활성화됐다. 푸드밸리 사무국의 예론 바우터(Wouter) 디렉터는 "농가(농업기업)는 연구기관과 함께 혁신적인 농법을 개발하고, 정부는 이러한 신기술에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고 했다.
이곳에선 네덜란드 기업뿐만 아니라 외국계 기업들도 함께 공동 연구를 하고 있었다. 바우터 디렉터는 "외국 기업들은 시장에선 경쟁자지만, 아직 존재하지 않는 시장을 창출하는 데 있어서는 훌륭한 협력자"라고 했다. 수직농장(vertical farm·아파트형 농장) 전문가인 뤽 흐라만스(Graamans) WUR 연구원은 "농업 기업이 WUR과 연구 개발을 함께 한 경우에만 정부가 투자를 지원해 줄 정도로 WUR에 대한 신뢰가 높다"고 했다.
바우터 디렉터는 "현재 푸드밸리의 최대 관심사는 AI 농장"이라고 했다. 농가는 토마토는 언제 심었다 수확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고 병충해가 덜한지, 양계장 온·습도는 어느 정도로 유지해야 닭이 최적의 상태로 자라는지 등의 데이터를 WUR에 제공한다. 푸드밸리 측은 "이러한 생장·생육·유통 정보는 기계학습(머신러닝)을 할 수 있는 기본 자료가 된다"며 "이를 토대로 사람의 도움 없이도 스스로 농작물을 키우는 AI 농업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 우리의 목표"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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