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민들에게도 묻고 배운 왕, 세종대왕이다. 조선은 중국의 농사법을 따라 농사를 지었는데 자연조건이 달라서 농사를 짓는데 어려움이 많았다. 그래서 세종은 우리 토양에 맞는 농사법을 개발하여 책으로 담고자 했다. 그 일을 고민하던 세종대왕은 새로운 방법을 찾아냈다. 농사에 경험이 많은 농부들을 찾아가 우리나라에 맞는 농사법을 물아보고 그들의 이야기를 정리하는 것이었다. 세종대왕은 각 지방에 관료들을 파견하여 농부들을 만나 그들에게서 좋은 씨앗을 선택하는 법, 씨앗을 뿌리는 법, 논밭갈이법과 재배법 등을 알아보고 정리하게 하였다. 그리고 궁궐 안에서 직접 농사를 지으며 농부들이 알려준 방법이 정말 좋은지 실험해 보았다. 그렇게 알아낸 내용을 담은 책이 바로 ‘농사직설’이다. 농사직설이란 ‘농민들에게 직접 물어보고 정리한 책’이란 뜻이다. 신분제도가 엄격했던 조선시대 때 왕이 농부들을 만나 배운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런데 세종대왕은 꼭 필요한 일을 묻고 배우는 것으로 농업을 더 발전시킬 수 있었다.
농사직설은 1429년(세종 11년)에 편찬했다. 취합된 농사 관련 데이터들은 총재 정초(鄭招)와 종부소윤 변효문(卞孝文)에 의해 요약되었다. 이 책은 19쪽의 간결하지만 획기적인 농서로 엮여졌다. 농사에 관한 직접적인 이야기만 다룬 까닭에 ‘직설(直說)’이라 이름 붙여졌다. 농사직설은 전라, 충청, 경상도의 가장 선진적인 농법이 중심이 되어 역어져서 변방의 함경도에까지 확산된 것이다.
본문의 내용을 보면 1. 비곡종(備穀種). 다음 해에 파종할 종자를 준비하는 법이다. 알맞은 곡식을 고르고 씨를 물에 담가 준비하는 법 등이 소개되어 있다. 2. 경지(耕地). 파종하기 전에 경작지를 갈아 일구는 방법이다. 땅을 가는 기본 방법은 물론이고 시비법(施肥法), 소를 모는 방법까지 소개하고 있다. 3. 종마(種麻). 마를 심는 방법에 대한 부분이다. 4. 종도(種稻). 벼를 심는 방법이다. 파종부터 시작하여 제초하는 법, 시비법까지 소개하였다. 5. 종서속(種黍粟). 기장과 조를 재배하는 방법이다. 6. 종직(種稷). 파를 심고 재배하는 방법이다. 7. 종대두소두녹두(種大斗小斗菉豆). 콩과 더불어 팥의 재배법을 설명하였다. 8. 종대소맥(種大小麥). 보리와 밀의 재배법을 설명하였다. 9. 종호마(種胡麻). 깨를 심고 기르는 방법을 설명하였다. 10. 종고맥(種蒿麥). 메밀의 재배법을 기술하였다.
이 책의 시비법(施肥法)은 이렇게 시작한다. 가을에 거름을 뿌려 땅을 갈아버리면 겨우내 거름이 숙성되는 원리를 통해 토지의 비옥도를 높이는 방식이다. 가을에 땅을 갈아 ‘푸른 것은 다 없애 버린다’고 해서 ‘추경법’이라고도 부르고, 논밭을 갈아 업고 거름을 뿌리면 선경후분(先耕後糞)’ 이지만 거름을 뿌린 후 논밭을 갈아 버린다고 해서 ‘선분후경(先糞後耕)’ 법이라 한다. 이렇게 시비법을 체계화시킨 결과, 과거에는 한 해에 농사를 짓고 나면 지력이 감퇴되어 다음해에는 쉴 수밖에 없는 ‘휴한법(休閑法)’이 일반화 되었는데, 이제는 토지를 한 해라도 놀릴 이유가 전혀 없어졌다. 이렇게 되자 해를 바꿔 농사짓던 방식은 완전히 사라졌다.
지력이 떨어진 땅은 황토를 뿌려 지력을 돋운 다음 다시 경작해 토지 사용의 효율성을 극대화시켰다. 이 방식을 객토법(客土法)이라고 부른다. 한 두 해 땅을 놀린 다음에 농사를 짓던 ‘휴한법’에서 해마다 농사를 짓는 ‘연작상경법(連作常耕法)’으로 전환하자 과거에는 감히 상상할 수조차 없던 1년 1작은 이제 기본 경작법이 된다. 여기에 종자를 1년 2작(콩+보리), 2년3작(조+보리+휴한+밀)도 가능해졌다. 또 여기에 ‘간종법(間種法)’이라 하여 작물과 작물 사이에 다른 작물을 심는 방법을 도입했다. 예컨대 콩밭 사이에 가을보리를 심거나, 보리밭 사이에 조를 파종하는 것이 그것이다. 후에 옥수수가 들어온 뒤에는 옥수수 밭 사이에 녹두나 팥을 심어 같은 토지에서 생산성을 몇 배로 늘렸다.
고려 초에 1결(結, 약 3000평)에서 평균 6~11석이 생산되던 것이 1430년에는 전라·충청·경상도에서 20~30석 내지 50~60석이 생산된다. 약 300~600퍼센트의 생산성 향상이 있었던 것이다. 이 것은 농사의 기본 원리를 바꾸면서 일어났다. 밭을 가는 방법으로 가을에 땅을 갈 때는 될수록 깊이 갈고 봄에는 그 반대로 새 땅이 안 나올 정도로 얕게 갈고 바로 흙을 덮었다. 농사직설은 농민들에게 지역과 토질에 따라 예전보다 훨씬 발달된 농사법으로 농사를 할 수 있게 하였고, 점차 농사의 기술이 향상되어 북부지방에서는 쌀 생산량이 늘어났다. 우리 나라 풍토에 알맞는 농사법으로 쓰여진 이 책은 조선시대 농학성립의 효시이다.
세종은 몸소 궁궐 후원에다 2홉의 조를 30여 평[1무(畝)]의 밭에 뿌려 1섬의 소출을 올리는 실험을 해 보기도 했다. 가능성을 스스로 타진하고 농부의 노역을 몸소 느끼며 공감하고자 한 것이다. 이에 대한 국왕은 스스로 이렇게 토로하고 있다. <내가 서속[粟, 조] 씨앗 2홉[合]을 후원(後園)에 심었더니 그 소출이 한 섬이 더 되었다.>(予以粟種二合, 種於後園, 其所出一石有奇。세종 19년(정사) 9월 8일) <내가 후원(後苑)에 1무(畝)의 밭을 경작하는데, 비록 가뭄을 당하여도 소출의 수량이 풍년에 뒤지지 않으니, 이것은 사람의 힘을 다한 까닭이다.>(予於後苑耕一畝之田, 雖値旱乾, 所出之數, 不下於豐年, 是乃盡人力之所致也。세종 21년(기미) 7월 28일)
중국의 농서인 농상집요(農桑輯要)를 중심으로 중국의 농업기술을 그대로 따르는데서 기술상의 문제점을 고치고자 했다.
농사직설은 여러 지방의 경험이 많은 나이든 농부들에게 농사짓는 비결과 경험적 지식을 일일이 자료를 조사하여 정리하였다. 이후 등장하는 농서인 ⟪금양잡록(衿陽雜錄)⟫(1492), ⟪농가집성(農家集成)⟫(1655), ⟪산림경제(山林經濟)⟫(1716년경), ⟪임원경제지(林園十六志)⟫(1827년경) 등이 여기에 영향 받았다.
참고: https://www.humanity.kr/861 [인문경영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