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하고 소외된 한국인들의 영원한 벗
60년간 가난한 한국의 소외받는 이웃들을 위해 모든 것을 내주고 ‘불모의 땅’에서 기적을 행한 지정환 신부. 우리는 그를 기억해야 한다. ‘임실 치즈의 대부’ 지정환 신부가 2019년 4월 13일 선종(善終)했다. 정부는 벨기에 출신의 사제에게 국민훈장 모란장을 추서했고, 많은 한국인은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스스로 장애를 가졌지만 장애인을 위해 헌신한 지정환 신부. [명인문화사 제공]
지정환(본명·디디에 세스반테스) 신부는 1931년 12월 5일 벨기에 수도 브뤼셀에서 3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12세기 기사 작위를 받은 귀족 가문으로 경제적으로 풍요로웠지만 부모님은 절약의 미덕을 강조했다. 디디에는 형, 누나가 가지고 논 다음에야 장난감을 가지고 놀 수 있었고, 집 마당의 자전거는 특별한 날에나 탈 수 있었다. 자신만의 자전거를 타고 싶었던 디디에는 늘 자전거를 타는 우편배달부를 꿈꿨다.
청소년기의 디디에는 가톨릭 사제라는 새로운 꿈을 꿨다. 벨기에 인구 80% 이상이 가톨릭 신자였고, 그의 친가와 외가에는 세대마다 적어도 한 명 이상이 사제의 길을 걸었다. 새로운 꿈을 가지게 된 그를 부모님은 “하느님의 사제가 되는 것은 영광”이라며 축복했다.
1950년 6월 브뤼셀 성베드로 고교를 졸업한 디디에는 가톨릭 전교협조회(SAM)에 입회해 예비 사제의 길을 걷는다. 그 무렵 평생을 함께한 친구 ‘한국’을 만난다. 브뤼셀의 한 극장에서 영화를 보러 갔다가 영화 상영 전 방영된 뉴스에서 ‘미지의 나라’ 한국의 전쟁 소식을 접한 것이다. 뉴스를 본 순간 디디에는 손을 모으고 기도를 시작했다.
“하느님! 한국을 지켜주시고 세상에서 전쟁이 일어나지 않게 하소서.”
뉴스가 끝나고 영화가 시작됐지만 그의 기도는 멈추지 않았다.
영화관에서 만난 한국 그해 브뤼셀의 루뱅가톨릭대에 입학한 디디에는 철학을 전공했다. 2년 만에 철학 학사를 취득하고, 1년간 전교협조회 신학교 연수를 거쳐 1954년 루뱅가톨릭대 알베르토 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게 된다.
신학교 시절, 디디에는 다시 한번 한국과 운명적으로 만난다. 대학 내 유이(唯二)한 한국인 이효상과 장병화를 만난 것이다. 훗날 제6, 7대 국회의장이 된 이효상은 그 무렵 문학과 철학을 공부하고 있었다. 제2대 천주교 마산교구장이 된 장병화 신부는 1938년 사제 서품 후 본당 사목을 거쳐 1954년부터 알베르토 신학교에 유학하고 있었다.
첫 만남 후 ‘두 한국인’과 교류가 잦아졌다. 두 한국인은 해외 선교를 꿈꾸던 디디에에게 한국을 추천했다. 디디에의 한국에 대한 관심은 커져갔고 결국 가족에게 “한국으로 선교 활동을 떠나겠다”고 선언했다. 막내의 ‘폭탄선언’에 부모님은 우려했다. 그들에게 한국은 지구의 동쪽 끝 전쟁 위협이 도사리는 낯선 나라였다. 부모님은 벨기에령(領)인 콩고를 추천했지만 디디에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콩고보다 한국에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더 많을 거예요. 하느님께서 저를 그곳으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1958년 7월 사제 서품을 받은 디디에는 그해 가을, 영국 런던대 동양아프리카연구학원(SOAS)에 입학했다. 해외 선교를 위해 필수였던 영어와 현지어인 한국어를 동시에 공부하기 위해서였다. 한국어 학습에 어려움을 토로하는 그에게 교수는 “한국어가 쉬운 언어인 줄 알았어? 중국어, 일본어보다 어려운 게 한국어야”라고 했다.
디디에는 한숨을 내쉬었다. 후회됐지만 포기할 수는 없었다. 시간을 아껴가며 한국어를 익혔다. 1959년 11월, 1년간 연수를 마친 디디에는 한국 전주지목구(1962년 전주교구로 승격) 사제로 발령받았다.
수에즈 운하를 거쳐 말레이반도를 경유하는 한 달여 항해를 거쳐 1959년 12월 8일, 디디에는 부산항에 도착했다. 다시 10여 시간 비포장도로를 달려 전주교구청에 도착했다.
낯선 땅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한 디디에가 부딪혀야 했던 첫 번째 벽도 언어였다. 무엇보다 한국인들은 그의 이름조차 낯설어했다. 이를 지켜본 전주교구 부주교(오늘날 교구장 총대리) 김이환 신부가 말했다.
“디디에 신부! 이곳 주민들과 가까이 지내려면 한국 이름이 필요합니다.”
김 부주교의 제안으로 디디에와 유사한 발음 ‘지’를 성(姓)으로 삼고, 김이환 부주교 이름 마지막 글자 ‘환’을 차용해 발음하기 쉬운 이름을 찾다 ‘지정환’으로 결정했다. 벨기에인 디디에 세스반테스가 ‘지정환’으로 다시 태어나는 순간이었다.
한국의 가난, 보릿고개지 신부의 삶을 다룬 ‘지정환 신부: 임실치즈와 무지개 가족의 신화’(2014)에 따르면, 지 신부는 한국에 도착한 이듬해 3월부터 전주교구 주교좌 전동성당 보좌신부로 봉직하다 1961년 7월 전북 부안성당 주임신부로 자리를 옮겼다. 그 시절 누구나 그랬듯, 부안도 가난과 보릿고개에 허덕였고 주민들을 구휼하는 게 시급했다. 미국의 대외원조 밀가루를 제공받으려고 물심양면 노력한 끝에 부임 이전 매월 40포대를 지원받던 밀가루는 2000포대까지 늘었다. 급한 불은 껐지만 근본 해결책은 아니었다. 식량 자급자족 방안이 필요했다.
지 신부는 서해 바다를 접하고 있는 부안의 지리적 특성을 활용해 농지를 간척하는 방안을 떠올렸다. 사업은 전임 부안성당 주임신부가 구상했지만 차일피일 미뤄진 일이었다. 갯벌을 간척해 농지로 만드는 사업은 네덜란드에서 성공한 사업이었고 이웃 벨기에 태생인 그에게는 익숙한 일이었다.
간척 사업 부지를 고민하던 그에게 부안여중이 떠올랐다. 학교 부지 내부에 바다에 묻힌 땅이 있었기 때문이다. 지 신부는 부안여중 관계자를 설득해 개간이 성공할 경우 소유권의 절반은 학교에 주고, 절반은 부안성당이 사용하겠다고 약속했다. 학교로서는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2017년 임실에 부임할 당시부터 현재까지 모습을 담은 사진집을 심민 임실군수에게 전달하는 지정환 신부. [임실군 제공]
간척 후보지를 찾은 그는 개간을 함께 할 사람을 구했다. 간척 후 농지 1정보(약 9917㎡)씩을 한 가족에게 분배하겠다고 제안했다. 3000평 넓이의 농지였다. 처음엔 반신반의하던 이들도 외국인 신부의 열정에 감화했고, 지 신부는 주임신부로서 업무시간 외 모든 시간을 간척 사업에 쏟아부었다. 3년간 공사 끝에 100정보(약 30만 평)의 새로운 농토가 생겼다.
간척사업은 성공리에 끝나 마음은 흡족했지만 낯선 풍토와 음식에 지 신부는 복통과 설사에 시달렸다. 1963년 서울의 한 대학병원에서 검사를 받았는데, 담당 의사는 ‘내과적 이상은 없으나 복통, 설사가 지속되는 이유는 정신병이니 벨기에로 돌려보내야 한다’는 소견서를 전주교구로 보냈다. 교구장 한공렬 주교로부터 이런 얘길 전해 들은 지 신부는 기가 막혔다. 귀국을 권하는 한 교구장에게 “나는 미치지 않았다. 다른 병원에서 재검사를 하겠다”며 항변했고, 결국 서울 청량리 소재 성바오로병원을 찾아 검사를 받았다. 검사 결과는 담낭(쓸개) 이상. 자칫 정신병자로 몰려 모국으로 돌아갈 뻔했던 그는 기쁜 마음으로 담낭 제거 수술을 받았다. 이후 그는 스스로를 ‘쓸개 빠진 놈’이라 우스갯소리를 하곤 했다.
수술 후 6개월간 벨기에에서 휴양한 그는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뒤 임실성당 주임신부로 자리를 옮겼다. 산세는 빼어났지만 고지대에다가 경작지가 부족한 임실에서의 삶은 척박했다. 주민들은 고랭지 재배가 가능한 고추나 고구마를 심어 생계를 이어갔다.
이곳에서도 지 신부는 지긋지긋한 한국의 가난을 떨쳐내려고 애를 썼다. 무엇이든 하려면 돈이 필요했다. 유럽에서 경험한 신용협동조합이 떠올랐다. ‘내 서랍 속에서 뒹굴면 그저 흔한 동전이지만, 그것이 모이면 누군가의 인생을 바꿀 수도 있다’고 생각한 그는 임실 신용협동조합을 만들고 제1호 조합원이 됐다. 시간이 흘러 동참하는 사람은 늘었고, 임실신용협동조합 자본금도 쌓여갔다. 한푼 두푼 모인 종잣돈으로 농지를 구매하거나, 급한 돈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이자 없이 대출을 해줬다. 처음엔 가톨릭 신자만을 대상으로 했지만 이후는 따로 선별하지 않았다. 임실 주민들은 저축이 남과 나를 돕는 일이라는 걸 깨달았다.
산양 두 마리와 임실치즈임실성당 부임 후 지 신부는 사제관에 산양 두 마리를 키웠다. 삼례성당 오기순 신부가 선물로 준 것이었다. 어느 날 물끄러미 산양을 보던 그의 머리에 아이디어가 번쩍였다.
‘그래 젖소에 비해 가격이 싼 산양을 키워 젖을 팔자. 산지인 임실에서 키우기에도 적합하잖아.’ 그는 새로운 사업에 관심 있는 젊은이들을 모아 산양 사육법을 교육했다. 한 명으로 시작한 ‘산양 교육생’은 이후 열두 명이 됐고, 자신이 기르던 산양이 새끼를 낳으면 분양을 했다.
의기투합해 시작한 일이었지만 ‘산양 사업’은 난관의 연속이었다. 사육 두수가 늘면서 산양유(乳)도 증가했지만, 판로가 마땅치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폐기 처분하는 산양유가 늘어났고, 불면의 밤이 이어졌다. 그러던 어느 날, 남는 산양유로 치즈를 만들면 되겠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문제는 치즈가 당시 한국인들에게는 아주 생소한 음식이었다는 점. 치즈에 대해 설명해봤지만 알아듣는 사람이 없다 보니 ‘치즈를 만들어 팔자’는 그의 제안은 반발에 부딪히기 일쑤였다. 고심 끝에 “치즈는 우유로 만든 두부”라고까지 설명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주민들에게는 지 신부에 대한 신뢰가 있었다. 자신들에게 해가 될 일을 시킬 사람은 아니라는 믿음이었다.
1966년 5월, 드디어 산양을 키우던 조합원들과 치즈 만들기에 도전했지만 결과는 대실패. 이후 실패가 거듭되자 벨기에 본가에 2000달러만 보내달라는 ‘SOS’를 쳤다. 그는 이참에 치즈 공장을 세우려는 거대한 계획을 세운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공장은 완공됐지만, ‘제조 기술’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치즈 관련 서적을 100번 넘게 읽으며 공부했지만 제대로 된 치즈를 만들 수 없었다. 결국 그는 치즈의 본고장 유럽으로 날아갔다. 프랑스와 벨기에의 크고 작은 치즈 제조 공장을 찾아 노하우를 기록하고 익혔지만 제조법 전체를 배울 수는 없었다. ‘영업기밀’을 이유로 생산공정을 외부인에게 공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수소문 끝에 소개받은 한 남자는 지 신부의 딱한 사정을 듣고는 노트 한 권을 건넸다. 치즈 제조법이 상세하게 담겨 있었다. 그는 이탈리아 공산당 간부였다. 유일신 하느님을 섬기는 사제가 유물론·무신론을 신봉하는 공산주의자의 도움을 받은 것이다.
고 지정환 신부의 장례미사가 열린 4월 16일 전주중앙성당에 지 신부의 영정사진이 놓여 있다.
지 신부는 전주 치명자산 성직자 묘지에 안치됐다. [뉴스1]
부푼 꿈을 안고 3개월 만에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 지 신부는 쓰러질 뻔했다. 그의 난감함과 고단함은 생전 인터뷰에 잘 나타난다.
“한국에 와보니 한 명 빼고는 다들 산양을 팔아치우고는 떠났더라고요. 그들 입장에선 앞날을 기약할 수 없었겠죠. 제가 돌아올지도, 치즈 만들기에 성공할지도 불투명했으니까요. 얼마나 절망적이었는지 몰라요. 하지만 포기할 수 없었어요. 이탈리아에서 받은 기적 같은 선물이 있었으니까요. 그 비법 덕분에 균일한 치즈를 만드는 데 성공했고 다시 사람들을 모을 수 있었어요.”
이탈리아 공산당원이 넘겨준 제조법에 따라 공정 하나하나 최선을 다했다. 매순간 기도도 빠뜨리지 않았다. 드디어 맛과 모양 어느 것 하나 빠지지 않는 ‘한국산 1호’ 치즈가 탄생한 것이다. 치즈 제조에 성공하자 사업은 날개를 달았다. 프랑스식 포르살류 치즈로 시작해 영국이 원산인 체더치즈도 제조했다. 사업 확장을 위해서는 브랜드가 필요했고, 조합원들 의견을 반영해 ‘지정환 치즈’로 이름 지었다.
‘치즈 세일즈맨’으로 변신한 그는 조선호텔 등 유명 호텔과 남대문의 외국인 전용 상점으로 판매처를 넓혔다. 1967년 설립된 임실치즈협동조합은 1970년대 국내 치즈 생산량의 70%를 담당할 정도로 성장했다. 1998년에는 임실치즈피자도 탄생했다. 오늘날 임실치즈가 지역사회에 끼치는 경제효과는 1000억 원 이상인 것으로 추정된다. 전국적으로 임실치즈피자 프랜차이즈 업체만 20여 개, 임실치즈를 쓰는 브랜드만 70여 개에 달한다. 박철민 지정환임실치즈피자 대표는 ‘신동아’와의 전화 통화에서 이렇게 회고했다.
“신부님은 늘 입버릇처럼 ‘부안 간척 시절 함께했던 이들은 첫째요, 임실치즈협동조합 구성원들은 둘째요, 무지개가족은 셋째요, 임실치즈피자를 함께하는 이들은 막내’라고 할 정도로 각별한 애정을 보였습니다. 우리의 가장 든든한 후원자이자 아버지를 잃었다는 슬픔에 무척 비통합니다.”
지 신부가 사업에만 신경 쓴 것은 아니었다. 1970년대 지 신부는 박정희 유신체제에 반대하는 저항운동에도 동참해 추방명령을 받기도 했다. 그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회고했다.
“제가 원주교구장 지학순(1921~1993) 주교 석방운동을 벌이다 체포되는 사진이 외신을 타고 나간 적이 있어요. 벨기에에 계신 부모님도 그 사진을 보셨죠. 벨기에 정부가 한국 외무부로 진상 조사를 촉구하는 의견을 보내 청와대도 골치 아프게 된 적이 있죠.”
당시 지 신부는 추방명령을 받았지만 ‘지 신부는 임실에서 농민들과 협동조합을 만들고 치즈를 만들어 팔며 농촌 발전에 기여했다’는 보고를 받은 박정희 대통령이 “구속도 추방도 하지 말고 임실로 돌려보내라”고 했던 것은 유명한 일화로 남아 있다.
치즈를 한국에 뿌리내리기 위해 노심초사하던 지 신부는 1976년 신체 마비 증상을 느껴 병원을 찾았다가 다발성신경경화증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뇌와 척수에 염증이 침범하는 병이었다. 날로 악화되는 병 치료를 위해 1981년 그는 벨기에행 비행기에 올랐다. 3년간의 치료 후 오른쪽 다리가 마비된 상태로 한국으로 돌아왔다. 전주교구는 장애인 사목을 권했고, 전북 익산 성모병원에서 장애인 사목을 시작한 그는 1984년 7월 중증 장애인 재활 쉼터 ‘무지개가족’을 만들었다. 전북 전주의 한 아파트에서 시작한 무지개가족은 전주교구와 벨기에 전교협조회의 도움으로 1989년 전북 완주군 소양면에 1만3223㎡(약 4000평) 규모의 보금자리를 마련했다. 3년 후에는 제2무지개가족의 집도 완공됐다. 100명 넘는 장애인이 이곳을 거쳐 재활하고 자립했다. 배기현 마산교구장은 지 신부가 무지개가족 규모를 키우지 않은 이유에 대해 ‘신동아’에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지 신부님은 ‘무지개가족 규모가 크지 않아야 진정 피를 나눈 듯한 관계를 형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규모카 크면 그리 할 수 없지’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그의 말에서 ‘진정성’을 느꼈습니다.”
“내 공로는 아무것도 없습니다”2002년 5월 호암재단은 한국인을 위해 헌신한 그를 기려 제12회 호암상 사회봉사상을 수여했다. 지 신부는 이때 받은 상금 1억 원에 지정환임실피자 수익 배당금을 더한 5억 원으로 ‘무지개장학재단’을 설립해 전북도민 중에서 장애인이거나 장애가족을 둔 학생에게 대학 4년간 학비를 지원하기 시작했다.
한국에 온 지 45년의 세월이 흐른 2004년에 그는 사제직에서 내려왔다. 이후 지 신부는 소양면 해월리에 ‘별아래’라는 이름의 저택에서 무지개가족에서 함께 일했던 사람들과 기거하며 마지막 열정을 쏟았다. 1800년대부터 1930년대까지 한국에서 활동했던 프랑스 가톨릭 선교사들의 행적을 정리해 전산화하는 것이었다.
한국을 위해 반세기를 헌신한 그에게 2016년 2월 정부는 대한민국 국적을 선물했다. 2012년 국적법 개정으로 ‘대한민국에 특별한 공로가 있는 외국인’에 대해 특별귀화를 허가했는데, 4년 후 법무부가 그에게 대한민국 국적을 부여한 것. 창성창본(創姓創本)도 허락받아 지 신부는 ‘임실 지씨(池氏)’의 시조가 됐고, 그해 11월 임실군으로부터 명예군민증을 수여받았다. 말년의 지 신부는 한국에서의 공로를 치하하는 사람들에게 “내 공로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다만 더 못 해서 아쉽습니다” 하고는 미소 지었다.
60년간 가난한 한국을 위해, 소외받는 이웃들을 위해 모든 것을 내준 지 신부는 불모의 땅에 기적을 행하고는 홀연히 눈을 감았다.
‘지정환 신부: 임실치즈와 무지개 가족의 신화’의 저자인 박선영 명인문화사 대표는 “지 신부님은 누군가 삶에 빛이 되는 사람이었다. 평생 희생하는 삶을 사셨지만, 그걸 당신께서 해야 할 일이라 생각하고 이를 실천에 옮겼다”며 “‘포용’의 가치를 몸소 실천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항상 먼저 손을 내밀었다”고 그를 기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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