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 어명보다 현장 판단에 따랐다
2016년 9월 전남 해남군 울돌목에서 열린 명량해전 재현 행사. 1597년 8월 충무공 이순신은 12척의 배로 일본 함대 133척과 싸워 31척의 적선을 격파해 승리했다. 프리랜서 장정필“하늘을 날로 삼고 땅을 씨로 삼아 온 천지를 다스릴 인재요, 하늘을 깁고 해를 목욕시키는 천지에 가득찬 공로다. 임진왜란에서 명나라 수군을 지휘한 제독 진린(陳隣)의 평가처럼 충무공 이순신의 존재감은 우리 역사상 가장 선명하게 남아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임진왜란은 조선 건국 200년 만에 찾아온 최대 위기였다. 미증유의 혼란 속에서 조선 수군뿐 아니라 명나라 수군과 지역 주민의 마음까지 얻으며 전쟁에서 승리한 충무공은 지도자의 전범(全範)으로서 평가받고 있다. “우리 군사와 중국 군사들이 순신의 죽음을 듣고 병영마다 통곡하였다. 그의 운구 행렬이 이르는 곳마다 백성들이 모두 제사를 지내고 수레를 붙잡고 울어 수레가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었다”는 『선조수정실록 』의 기록은 그의 위상을 잘 드러낸다.
세 번의 파직과 두 번의 백의종군이라는 순탄치 않았던 관직 생활 속에서 그는 어떻게 23전 23승을 거뒀을까. 전문가들은 충무공의 업적 뒤에는 특별한 리더십이 있었다고 입을 모은다. 충무공 연구가인 노승석 여해고전연구소장은 “열악한 환경에서도 모든 역량을 끌어내 승리를 거둔 충무공의 리더십은 코로나19 라는 전례 없는 위기를 맞은 현재에도 훌륭한 모델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28일 탄신 476주년을 맞는 충무공의 리더십을 4가지로 정리해봤다.
이순신이 전쟁 중 남긴 『난중일기』 [중앙포토]
적극적 소통
오종록 성신여대 사학과 교수는 ‘소통’을 강조했다. 오 교수는 『21세기 한국 사회와 이순신』이라는 논문을 통해 “이순신은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뒤 한산도의 통제영에 운주당이라는 건물을 지은 뒤 여러 장수와 의논하고, 지위가 낮은 군졸이라도 서슴지 않고 와서 말을 하도록 했다”고 설명했다. 또 “(전투를 앞두면) 부하 장수들을 모두 불러서 계책을 묻고 전략을 세운 뒤 싸웠다. 이렇게 한 까닭에 모두 승리할 수 있었다”며 “지금 명칭은 ‘회의’라 하면서 상급자가 일방적으로 지시사항을 전달하고 끝내는 경우가 있는데, 오히려 400년 전 이순신의 회의가 더 민주적이고 덜 권위적이었음이 분명하다”고 말했다.
실제로 그는 부하들과 수시로 전략전술을 토론한 것으로 유명하다. 임진왜란 발발 한 달 전에는 유성룡이 보내준 『증손전수방략(增損戰守方略)』이란 책을 전달받고 부하 장수들과 밤새 연구한 결과 그 책이 매우 훌륭한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고 『난중일기』에 기록하고 있다.
철저한 준비
전쟁을 앞두고 충분한 대비태세를 갖춘 것도 꼽힌다. 노승석 소장은 “이순신은 전쟁을 위해 무엇이 우리에게 유리하고 불리한지를 먼저 따져 상황을 파악한 뒤 전쟁을 철저히 대비했다”며 “『난중일기』에서도 ‘요행과 만일이란 실로 병가(兵家)의 장구한 계책이 아니다’라고 언급했다”고 말했다.
이순신은 해전에서 조선과 일본의 군사력 차이를 잘 이용했다. 일본 군선은 작고 견고하지 못한 대신 속도가 빠르다. 반대로 조선의 군선은 크고 튼튼하지만 둔중하고 느리다. 그래서 이순신은 적선과 부딪히는 당파(撞破) 전술을 쓰는 동시에 거북선이라는 돌격함을 제작해 장점을 극대화하고 단점을 보완했다.
이순신은 당시 군포(軍布)를 내고 군역에서 빠지는 방군수포(放軍收布)의 관행을 끊기도 했다. 당시 조선에서 수군은 열악한 대우 때문에 천역(賤役)으로 치부돼 기피자가 많았는데, 방군수포를 근절하고 병력을 확보한 것도 승리 요인으로 꼽힌다.
관민 통합
허남성 한국국방연구원 박사는 “민군통합전비태세를 훌륭히 강구했다”고 평가했다.
허 박사가 쓴 『충무공 이순신 리더십 연구』에 따르면 이순신은 전쟁으로 군량을 확보하기 어려워지자 백성들에게 생필품(소금)을 제공해주고, 그에 대한 반대급부로 식량을 얻었다. 결과적으로 민과 군이 통합해서 전비태세를 완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선조실록』에도 이순신이 육지에서 군수품을 공급하기 어려워지자 “일면의 바다와 포구를 부속시켜 주면, 양식과 장비를 자급자족하겠다”며 바닷물을 끓여 소금을 구워 팔고, 곡식 수만 섬을 비축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또 한산도 군영에 생활 비품을 마련하고 백성이 이주해 살도록 하는가 하면 명량대첩에서는 여러 섬에 흩어져 정박한 피난선 100여 척을 수군의 뒤에 벌려 세우도록 해 전선으로 위장하고, 자신은 10여척의 선박을 이끌고 나가 일본 수군에 승리했다.
현장 판단 중시
이순신은 현장의 전문가가 판단해 상황에 대처해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했다.
1597년 일본군 장수 고니시 유키나가 측이 경상우도 병마절도사 김응서에게 가토 기요마사의 행적을 알려주자, 선조는 배를 이끌고 가토 기요마사를 잡도록 했다. 그러나 이순신은 그 정보가 속임수라고 판단해 따르지 않았다. 이때문에 ‘왜장을 놓아 주어 나라를 저버렸다’는 모함으로 파직됐다. 훗날 비슷한 상황이 재연됐을 때 원균은 정보에 따라 대처하다 칠전량 해전에서 조선 수군 대부분을 잃고 본인도 전사했다. 오종록 교수는 “‘도성 밖의 일은 장수가 처결한다’는 원칙이 있다. 왕명을 받들어 전쟁터에 나가 있는 장수에게 조정이 구체적인 전술을 지시하는 것은 명백한 잘못”이라고 지적했다.
유성운 기자 pirate@joongang.co.kr [출처: 중앙일보] 군졸 의견도 귀기울인 이순신, 어명보다 현장 판단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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