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크라테스의 회상
저자:엄정식
출판사:철학과 현실사
출판년월일:1993. 11. 15.
이탈리아의 남단에 있는 항구 도시 브린디지에서 배를 타고 18시간 동안 지중해를 항해하여 나는 그토록 꿈에 그리던 그리스의 파트라수애 닿았다. 여기서 다시 기차로 갈아타고 두 시간을 달리자 철학의 고향이며 민주주의의 출생지이기도 한고도 아테네에 도착하였다. 나는 이곳에서 여장을 풀고 하룻밤을 거의 뜬눈으로지샌 다음 이튿날 아침 일찍 일어나 유서 깊은 델피의 아폴로 신전으로 향하였다.
차창 밖에는 아따금씩 가랑비가 내리고 있었고 역사책에서나 나올 만한 지명들의 도로 표지가 창 밖을 스치고 지나갈 때마다 나는 '시간에서 영원'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은 기이한 느낌을 갖기도 하였다. 정오가 가까울 무렵 마침내 나는 2천 3백년 전 소크라테스가 아폴로 신으로부터 신탁을 받았던 델피의 신전에 이르렀다. 아직도 건재한 제단과 돌기둥이 때마침 몰려온 짙은 안개에 휩싸여 매우 신비스런 분위기를 자아내었다.
나는 그 유적지로 달려가는 동안 줄곧 소크라테스가 신전의 벽 어디에서 보았다던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을 음미하고 있었다. 변화무쌍한 온갖 형태의 난무하는구름과 시시각각으로 색깔을 바꾸는 짙푸른 지중해를 가로질러 가면서도 나는
잠자는 아테네 시민들에게 그가 무엇을 절규했는지 그리고 그것이 지금 우리에게어떠한 의미를 지닐 것인지에 대해서 생각했던 것이다. 설악산 기슭을 연상하게하는 그 깊은 산골의 오솔길을 따라 올라가는 동안 나는 그의 가슴을 짓누르고
있었던 철학적인 문제들은 무엇이었으며 그가 통감했던 시대적 사명은 어떤것이었는지 가늠해 보기도 하였다.
나는 또한 통일신라의 고승인 혜초가 된 심정으로 그리스의 산천초목과 문화적 유산들을 예사롭지 않게 주시해 보기도 하였다. 그는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당시의 사상계를 지배하던 불교의 진수를 파악하기 위하여 당나라에 가서 인도의 스님 금강지의 제자가 된 후 그의 권유로 멀리 인도까지 가서 성적을 순례한 다음 여행기인 "왕오천축국전"을 남김으로써 민족 사상의 발전에 크게 공헌한 사람이다.
내가 감히 그의 입장이 되어 보고 싶었던 이유는 그와 같은 불후의 작품을 남겨 보고자 했떤 충동도 있었지만 도 중요한 것은 애오라지 통일된 조국을 가졌던 그가 '분단의 시대'를 살아가는 한 지식인으로서 무척 부럽기도 했기 때문이다.
사실 고대 그리스에서 발상된 자유와 평등이라는 두 개의 이질적인 정치 이념이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대립을 통해 굳혀ㅈ고 그 후 2천여 년에 걸쳐서 각기 지구를 반대쪽으로 돌아 마침내 자유민주주의와 공산사회주의의 형태로 조국을 두동강이 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니 마음이 더욱 착잡하고 또 울적해졌다. 그 진원지인 델피의 아폴로 신전 앞에 서서 소크라테스의 가르침을 음미하고 혜초의 행적을 더듬어 본다는 것은 남의 식민지에서 태어나 동족상잔을 겪다가 반쪽이 된 땅에서 죽고 싶지는 않다는 통한의 의미가 들어 있다. 또한 거기에는 분단된 조국을 물려 받을 의무가 없듯이 그것을 후손들에게 물려줄 권리도 우리에게 없다는 비장한 각오가 담겨 있는 것이다.
나는 안내원의 설명을 들으며 비에 촉촉히 젖어 있는 경내를 이리저리들러보았다. 바로 여기서 소크라테스는 위선과 타 락과 궤변으로 소일하던 아테네 시민들을 일깨우도록 아폴로 신으로부터 철학적 사명을 부여받은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소위 민주파에 속하는 인사들에 의해 민주주의를 반대하고 새로운 신을 끌어들였으며 청년들을 타락시켰다는 죄목으로 독배를 마실 때까지 무엇이 과연 바람직한 삶이고 무엇이 참다운 진리이며 정의인지를 설파했었다. 짙은 안개 속에 파묻힌 신전의 돌기둥 사이로 그의 목소리가 아직도 들려 오는 듯하였다
소크라테스는 누가 과연 최고의 현자인지를 알아보기 위하여 거기에 갔었다. 놀라웁게도 신탁은 항상 무지하다고 생각했던 자기가 최고의 현자라는 것이었다. 그는 잠시 당황했으나 이 말을 "아! 모두가 무지하기는 마찬가지인데 나 홀로 그 사실을 알고 있으니 내가 제일 현명하다는 뜻이로구나..." 이렇게 이해하였다.
그는 또한 이러한 사실을 아테네의 모든 시민들에게 전파할 것을 말하자면 깊은 무지의 잠에 떨어진 시민들을 일깨우는 것을 필생의 과업으로 삼았던 것이다. 그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에는 어디든지 가서 상대를 가리지 않고 대화를 나누었다. 그리하여 자기가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 왜 거짓인지를 일깨워 주었다. 제자인 크세노폰은 "소크라테스의 회상"에서 다음과 같은 대화를 전해 준다.
"에우티데모스 델피에 가본 적이 있는지 말해 보게" 소크라테스가 말했다. "네. 두 번쯤" 그가 대답했다. "그러면 신전의 벽 어디엔가 '너 자신을 알라'고 씌어 있는 것을 보았는가?" "보았읍니다." "그래서 그 명구에 관해서 아무 생각도 없었는가, 그렇지 않으면 거기 주의를 기울이고 그대 자신을 검토해보려고 애를 썼나?" "저는 정말 그렇게 애를 쓰지는 않았는데요 이미 저 자신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대 생각에 자기 자신을 안다고 하는 사람은 그냥 제 이름을 아는 사람인가, 혹은 어떻게 하면 인류를 위한 봉사에 자신을 적용시킬 것인지 스스로 분명히 하면서 자기의 능력을 아는 사람인가?
자기를 아는 사람은 무엇이 적합한 것인지 스스로 알며,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할 수 없는지 분별하며, 또한 어떻게 할 것인지 아는 바를 해냄으로써 필요한 것을 얻고 그리고는 모르는 것을 삼가함으로써 비난받지 않고 살아가며 또 불운을 피하게 된다네"
이와 같이 소크라테스는 조각가인 자기 아버지처럼 사람들의 마음에 형상을 새겨 주었으며 산파인 어머니처럼 사람들이 각자 잉태하고 있는 진리를 스스로 출산할 수 있도록 도왔다. 이렇게 해서 철학은 만물의 근원이 무엇인지를 묻는 '지식의 학문'에서 나 자신이 누구인지 혹은 무엇이 과연 바람직한 삶인지를 묻는 '지혜의 학문'으로 변모된 것이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페리클레스가 이미 사라진 허위와 퇴폐와 불의의 거리에서 진리와 도덕과 정의를 부르짖었기 때문에 매우 거북하고 위헙한 인물로 여겨졌다. 그 당시 아테네는 그리스 전역의 중심지로 성장하였고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는 물론 문화적으로도 서구 문명의 꽃으로서 그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바로 여기서 아테네 시민들은 상대주의적인 가치관과 이기주의적 사고 방식으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 그들은 민중의 이름으로 인류가 낳은 최대의 현자 중의 한 사람에게 독배를 마시게 하였으며 그 대가로 나라를 잃는 비애를 맛보아야 했던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가장 탁월한 제자인 플라톤은 "변명"에서 아테네 시민들에게 마지막으로 던진 그의 절규를 다음과 같이 전해 준다.
친애하는 아테네 시민 여러분! 나는 여러분을 사랑하고 존경합니다. 그러나 나는 여러분보다 신을 더 따를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숨을 쉬고 힘이 남아 있는 한 진리를 추구하고 여러분들을 경고하고 계몽하며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내가 지금까지 해온 바와 같이 양심적으로 말하기를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나의 가장 친애하는 벗들이여 가장 위대하고 정신적인 도야로 뛰어난 도시의 시민들인 당신들은 돈지갑을 가능한 한 많이 채우고 명성과 존경을 얻고자 허겁지겁하고 있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으며 도덕적인 판단과 진리 그리고 영혼의 개선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고 또 노력도 하지 않는도다!
나는 땅거미가 짙어지기 시작할 무렵 아테네로 돌아오는 버스 속에서 페리클레스가 통치하던 아테네 시민들과 오늘의 한국인들을 비교하고 있었다. 그들 못지않게 활기에 차 있고 자부심과 긍지가 넘쳐서 세계 어디를 가나 관심을 끄는 우리들에게 소크라테스의 이 꾸짖음은 과연 어떻게 들릴 것인가. 요즈음 우리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는 여러가지 사태들을 주시하고 염려하듯 나는 우리의 앞날을 너무 낙관하고만 있을 수가 없다는 느낌을 갖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분명히 활기에 차 있으나 너무 들떠 있는 것도 또한 사실이며 패망의 길을 재촉한 그들처럼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는 채 동강난 배를 타고 우왕좌왕하면서 정처없이 표류하고 있기 때문이다. 서구 문명의 여명기에 그들은 오늘날 우리 민족이 남북으로 갈리어 쟁패를 벌이듯이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서로 다투어 투쟁을일삼다가 결국 마케도니아의 침공을 자초하고 알 렉산더의 등장 이후 현대에 이르기까지 그 찬란하던 횃불을 다시 밝혀 볼 기회가 없었던 것이다.
그동안 우리는 마치 통일이 눈앞에 다가온 듯이 흥분해 있었으며 그것은 모든 가치의 위에 군림하는 최상의 명제처럼 받아들여지기도 했었다. 적어도 한민족의 한성원이라면 아무도 감히 통일이 우리에게 바람직한 것인지 의심하려 들 지 않고 또 그래서도 안 될 것이다. 그것은 고대 그리스인들이 아폴로의 신탁을 의심하는 것만큼이나 불경스러운 일로 여겨진다. 그러나 우리는 어떠한 희생을 치르고서라도 반드시 지금 당장 통일을 이루어야 하는 것인가 물론 이러한 질문은 마치 통일을 원하지 않는 것처럼 오해받을 수도 있기 때문에 함부로 제기되어서는 안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퉁일을 가로막는 문제들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해서라도 좀더 근원적인 소크라테스적 질문을 던지지 않으면 안 된다. 만약 반세기기 지나도록 어떤 형제들이 집안 문제로 계속 다투고만 있다면 과연 그들이 정말 한 부모 밑에서 그리고 가문의 위신과 명예를 위해서 다시 만날 의도가 있는 것인지를 물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주위를 둘러보면 우리 중에 과연 누가 진정으로 통일을 원하는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큰 통일을 위해서는 반드시 작은 통일이 먼저 이루어져 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제각기 뿔뿔이 흩어져서 억압과 투쟁 착취와 쟁취로 날이 저물고 퇴폐와 향락 증오와 불신으로 밤을 지새운다. 벼락부자가 된 집안이 형제들간의 이권 다툼으로 풍비박산이 되듯 모처럼 찾아온 기회와 운세를 우리는 미처 감당하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마저 드는 것이다. 우리는 정말 갑자기 비대해진 몸 집을 주체스러워하는 사춘기의 청소년에 지나지 않는단 말인가. 그 장구한 역사를 통해 불운과 수난만을 거치면서 다져진 이 불굴의 의지와 저력을 분열과 투쟁으로 탕진하고 파괴와 증오로 소모시켜 버릴 수ㅂ에 없단 말인가. 이러한 혼돈과 무질서한 상대주의를 '다원화 사회'나 '민주화'란 이름으로 미화시키는 것은 일종의 자기 기만이 아닌가.
아테네에 돌아왔을 때에는 이미 날이 저물어 아름다운 야경이 여러 유서깊은 유적들을 조명하는 불빛과 함께 눈앞으로 다가왔다. 그러나 나는 몸과 마음이너무 피로하여 거리로 나설 엄두를 내지 못하였다. 일찍 잠자리에 들었으나 밤거리의 소음과 온종일 고심하던 문젯거리들이 다시 먹구름처럼 되살아나 좀처럼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나는 아테네의 도심에 있는 어느 여인숙에 몸을 눕히고 2천여 년 전의 그곳과 2억만 리나 떨어져 있는 오늘의 서울 사이에 어떠한 유사점이 있는지를 찾아보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나는 우리 민족 전체가 다시금 풍전등화와같은 위기로 치닫고 있는 것은 아닌지 안타까워하였다. 역사의 대전환기를 맞이하여 각자가 수도자의 자세를 갖추고 극기와 절제의 삶을 살아가야 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마치 내일은 아무래도 좋은 사람들 처럼 파괴적 이기주의와 관능적 쾌락주의의 화신이 되어 민족의 긍지와 자존심을 마구 짓밟고 있다는 의구심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우리에게 '인간이 만물의 척도'라고 주장하는 프로타고라스들과 '강한 자의 이익, 즉 힘이 곧 정의'라고 외치는 트라시마쿠스들, '관능적 쾌락만이 가장 바람직한 것'이라고 철없이 떠벌리는 아리스티푸스들, 신을 모독했다고 아버지를 고발하는 에우티프론들, 그리고 진리는 아무데도 없으며 있어도 알 수 없다는 고르기아수들은 얼마든지 있는데 소크라테스와 같은 단 한 사람의 현자를 찾아보기 어렵다는 사실을 나는 안타까워하였다. 한반도 전체를 자기 자신과 사투를 벌이는 도장으로 만들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쾌락주의의 놀음판과 기회주의의투기장으로 돌변하고 있는 현실을 우려하기도 하였다. 상당히 많은 경우에 사람들은 사사로운 이익을 염두에 두고 있음이 명백함에도 불구하고 겉으로는 정의 구현과 민주의 실현을 부르짖는 위선에 허탈감을 감출 수가 없었다. 마치 난파하려는 배의 갑판에서 이리 뛰고 저리 뛰는 선원들처럼 각자가 제자리를 떠나고 있는 혹은 떠날 수밖에 없는 실정에서 우리는 민주와 통일이란 구호만을 계속 목청높여 외치고만 있을 것인가.
나는 우리 민족이 탄 배가 정박해 있거나 표류하지 않고 순조롭게 항해하기 위해서라도 이러한 가치들이 우리에게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지 묻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소크라테스처럼 당장 거리로 뛰어나가 '민주란 무엇인가?' '통일은 무슨 뜻인가?' 등의 질문을 마구 퍼붓고 싶었다. 우리가 그것을 절박하게 필요로 하면 할수록 그러한 것들을 이룩하기 위한 필요충분 조건이 무엇인지를 다시 말해서 소크라테스가 즐겨 던졌던 근원적인 질문들을 스스로 진지하게 던져 보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였다. 지금 바로 이 시점에서 인류 문명 발상 이래의 염원인 그러한 가치들의 실현을 이토록 조급하고 절박하게 추구해야 하는 것인지 그리고 과연 그것이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유일한 가치이며 동시에 최고의 가치인 것인지를 거듭 물어 봐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절제된 열정을 가지고 성숙한 여건을 조성하였을 때 그리하여 각자가 제자리를 다시 찾고 자기 분야에서 최선을 다했을 때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히고 진지하게 제기해야 더욱 효과적인 문제인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이튿날 아침 나는 일찍 여장을 갖추고 아테네 거리로 나섰다. 시내에는 토가를 입은 시민들 대신 양복으로 말끔하게 단장한 남녀들로 들끓고 있었고 귀족들의 마차 대신 각종 수입 차량들이 질주하고 있었지만 아테네는 역시 과거의 도시라는 느낌을 받았다. 거리를 메우고 있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관광객들이거나 이들을 맞이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사람들같이만 느껴졌고 도심의 즐비한 현대식 건물들도 폐허가 된 파르테논 신전과 박물관 그리고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 여러 유적지들을 관리하기 위한 시설들로 보였기 때문이다. 더구나 나는 주로 철학사적인 관심을 따라 발길을 옮겼기 때문에 극히 제한된 아테네를 둘러본 셈이다.
물론 나는 쿠베르탱남작의 공로로 근대 올림픽이 시작된 스타디움에도 가보았고 아테테 대학교의 철학과에도 들러 보았다. 그러나 그 스타디움의 규모나 시설은 잠실에 있는 올림픽 스타디움과 비교도 될 수 없기 때문에 역사적 의미밖에 없었고 아테테 대학교도 브라스토스 겉은 거장들이 이미 오래 전에 이곳을 떠났기 때문에 그 옛날 빛나던 '아카데메이아'의 명성을 찾기는 어려운 형편이었다. 아테네의 매력은 역시 그것이 찬란한 과거를 가졌다는 점에 있고 현대를 지배하는 문명의 발상지였다는 사실에 있으며 무엇보다도 철학적 진리를 위한 최초의 순교자인
소크라테스를 창출했다는 점에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소크라테스의 추억을 더듬어 길을 물어 가며 여기저기를 들러 보았다.
아크로폴리스 언덕의 장엄한 파르테논 신전은 그 규모와 아름다움에 있어서 단연 압도적이었다. 디오니소스 극장과 페리 클레스가 열변을 토하던 프니크스 언덕 그리고 웅장한 제우스 신전과 하드리안 아치에도 가보았다. 필로파푸스 기념탑과남산처럼 도심에 우뚝 선 리카비토스산에도 올라가 보았다. 전통적인 의상을 입고 대통령궁을 지키며 스스로 관광 자원이 되고 있는 의장대의 모습도 구경하였다. 그러나 나의 관심을 가장 많이 끌고 그래서 가장 오래 머물렀던 곳은 소크라테스가 갇혀 있었다던 감옥 자리였다. 그것은 파르테논 신전이 마주보이는 언덕에 위치해 있었다. 얼마 전까지도 감옥으로 쓰였던 듯 녹슨 철문이 달려있는 깊숙한 동굴이었다.
소크라테스의 감옥은 일반에게 널리 알려진 관광 명소가 아니었으므로 무척 찾기가 힘들었다. 거의 반나절을 헤매다가 겨우 그곳을 확인하고 동굴로 들어섰을 때 코를 찌르는 냄새 때문에 멈칫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두컴컴한 주위를 살펴보는 동안 비애와 분노와 절망에 찬 소크라테스의 환영이 점점 앞으로 다가온다고 느끼는 순간 나는 악취와 습기와 먼지로 뒤범벅이 된 동굴 바닥에 앉아서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플라톤이 그의 몇몇 "대화록"에서 전하는 소크라테스의 마지막 모습이 눈앞에 전개되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대강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소크라테스의 제자들은 그에게 아무런 죄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그들은 감옥으로 찾아가서 "간수들 을 모두 매수하였으니 도망치시지요"라고 호소하였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지금까지 나는 아테테 시민으로서 특권과 자 를 누려 왔네. 그런데 법이 이제 나에게 사형을 선고했다고 해서 그 결정을 회피한다는 것은 부당한 일일세. 더구나 내가 지금 죽는 것이 훨씬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저 세상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고 누가 말할 수 있겠나"라고 말했다. 드디어 독배를 마시는 날이 다가왔다. 그는 조용하고 침착하게 독이 든 약을 다 마셔 버렸다.
플라톤은 "파이든"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이때까지 우리들 대부분은 슬픔을 억누를 수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 눈앞에서 소크라테스가 잔을 기울여 독을 마시고 난 것을 보았을 때 우리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눈물이 걷잡을 수 없이 흘렀다. ...그는 방안을 이리저리 거닐다가 다리가 무거워진다고 했다. 그리고 나서 시키는 대로 침상에 반듯이 눕자 그에게 독을 건넨 옥졸이 이따금씩 그의 다리와 발을 살폈다. 한참 후 발을 세게 누르며 감각이 있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는 없다고 대답했다. 그의 다리와 몸이 점점 굳어져 갔다. 그것을 안 소크라테스는 자기 손으로 만져보고 "약기운이 심장에까지 미치면 그만이겠지" 하고 말했다. 하복부 근처가 식어 가는 것을 느꼈을 때 손수 얼굴까지 덮었던 이불을 젖히고 말했다. 이것이 마지막 말이었다.
"크리톤, 내가 아스클레피오스에게 닭 한 마리를 꾸었는데 잊지 말고 갚아 주기바라네" "틀림없이 갚겠습니다" 하고 크리톤이 말했다. "그밖에 다른 부탁은 없습니까?" 이 말에는 대답이 없었는데 잠시 후 움직이는 기척이 있었으므로 옥졸이 이불을 벗겼다. 눈은 이미 움직이지 않았다. 크리톤이 눈을 감기고 턱을 괴었다. 이것이 내가 일찍이 알던 모든 사람 중에 가장 지혜롭고 가장 올바르고 가장 뛰어난 분이라고 진정으로 부를 수 있는 우리의 친구 소크라테스의 최후였다.
이것이 "소크라테스의 시대에 태어난 것을 신께 감사한다"고 고백했던 플라톤의기록이다. 나는 그 동굴에서 빠져 나오면서 현기증 같은 것을 느꼈다. 소크라테스의 임종을다시 한 번 지켜 보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아니 그보다는 그의 삶과 죽음이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쉽사리 가늠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그리스를 여행하는 동안 고국에서 날아온 소식은 각계에서 민주화 요구가 점점 더 거세어지고 있고 통일 논의가 새로운 쟁점으로 등장한 가운데 아직도 우리는 혼미의 소용돌이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나는 안개 속에 잠겨 있는 아폴로 신전의 육중한 돌기둥과 그 황폐해진 소크라테스의 감옥 근처를 쉽사리 떠날 수가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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