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산촌 부녀자들이 즐겨 불렀던 다음과 같은 산나물타령 이 있었다. 즐겨 불렀다기보다 부르지 않고는 살 수 없었던 생존의 노래였다. 비오느냐 우산나물/ 강남이냐 제비풀/ 군불이냐 장작나물/ 마셨느냐 취나물/ 취했느냐 곤드레/ 담넘어냐 넘나물/ 바느질 골무초/ 시집갔다 소박나물/ 오자마자 가서풀/ 안줄까봐 달래나물/ 간지럽네 오금풀/ 정주듯이 찔끔초. 산나물타령은 외우는 산나물 가짓수에 따라 12마당짜리 33마당짜리 99마당짜리까지 있었으니 그것을 외운다는것은 힘든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더욱이 산속을 헤매며 그 산나물을 확인하고 익히며 외워야 하기에 더욱 그렇다.
산나물타령은 노래가 아니라 보릿고개를 넘기지 않고는 살아낼 수 없었던 우리 산촌살이의 생존의 조건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산촌에 시집가려면 적어도 33마당짜리는 익혀야만 했던 것이다. 먹을 수 있는 산채의 많은 가짓수를 한국 사람만큼 알고 있는 민족도 없을 것이라고 말한 것은 개화기때 한국에 와 선교했던 목사 게일이다. 그리고 서양에서는 독초로 분류되어 소나 양도 먹지 못하게 하는 고사리, 그 고사리를 우려 독을 빼가면서까지 상식한데서 산채문화의 극치를 볼 수 있다고 경탄하고 있다. 추위를 막는데 구태여 비단옷이랴/ 주린 배 채우는데 산채면 어떤가/ 이밖에 잔시름 없으면 그 좋지 않으리. 나물먹고 물마시고 팔을 베고 누웠으니| 하듯 산나물은 청빈과 빈곤의 상징이다. 곧 산채문화가 발달했다는 것은 우리 조상들 입에 풀칠하기 얼마나 어려웠던가를 말해 주는 것이 된다.
보릿고개를 살아내는데 산나물서리 라는 습속이 있었다. 양식이 떨어지면 산촌의 아낙들은 산에 들어가 광주리 가득히 산채를 뜯고 꺾어 이고 인근 마을의 좀 먹고 살것이 있어 보이는 집을 선택, 찾아든다. 뒤란에 산채를 펴놓으면 그집 마님은 그 산채의 대가로 보릿되를 퍼서 밥지어 먹고 가라고 양식을 내준다. 물론 주문되지 않은 산나물이기에 강매행위요 반약탈행위임에는 틀림없으나 보릿고개를 공생공존하며 살아내는 우리 조상들의 미풍이 아닐 수 없다.
근간에 이웃 일본에서는 자연대로의 맛을 추구, 산채 붐이 이는 바람에 산채가 남벌되어 입산금지구역을 확대한다든가 입산료를 받는다든가 채취한도를 정한다든가 하여, 산채로써 생계를 잇는 이들에게 산채권을 부여하는 등 자연보호차원에서 산채가 크게 부각되고 있다. 우리 나라에서도 관광지의 산채백반이나 선물로써의 건조산채의 비율이 높아지면서 산채가 남벌되어 수확량도 줄어들고 있다는 산채시즌의 소식이니 타산지석이 아닐 수 없다.
-이규태코너 산채권 1993. 06. 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