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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우시인사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시(詩)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시(詩)

 

1908년 11월 열여덟 살 청년 최남선이

잡지 <소년>의 권두에 <해(海)에게서 소년에게>를 발표했습니다.

정형시의 틀을 무너뜨린, 한국 현대시의 들목이 된 작품이었습니다.

이를 기점으로 하면 2008년은 한국 현대시 100년의 해입니다.

 

현대시 100년을 맞아 조선일보가 현역시인 100명의 추천을 받아 선정한

현대시 100편 중 상위 10위에 추천된 10편을 수집, 정리해 보았습니다.

    

   

 

<풀> 김수영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 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김수영(金洙暎,1921~1968) : 서울 출생. 연희 전문 영문과 중퇴. 1945년 <예술부락>에 <묘정의 노래>를 발표하면서 창작활동을 시작했다. 박인환 등과 함께 시집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을 간행하고, 해방 후 모더니즘 운동을 주도했다. 초기에는 모더니스트로 출발했으나, 4.19의거 이후에는 현실성. 산문성을 중시하여 강렬한 현실 의식과 저항 정신에 기반한 참여시로 나아갔다. 시집 <달나라의 장난>(1945), <거대한 뿌리>(1974)가 있고, 산문집으로는 <시여 침을 뱉어라>(1975)가 있다.

 

   

<님의 침묵(沈默)>  한용운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적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서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에 날어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指針)을 돌려 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한용운(韓龍雲, 1879~1944) : 시인, 승려, 독립운동가. 충남 홍성출생. 속명(俗名)은 유천(裕天), 자는 진옥(眞玉), 법호(法號)는 만해(萬海), 용운은 법명(法名)이다.
백용성 스님과 함께 3.1운동에 적극 가담하여 민족 대표로 서명, '독립선언서'에 공약3장을 추가하고, 거사 당일 선언서를 낭독한 뒤 일경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한국 근대사가 내포하고 있던 모순과 문제점을 첨예하게 파악하고 실천적으로 극복하려고 노력한 민족의 선구자인 동시에 전통의 창조적 계승을 성취함으로써 문학사의 한 획을 그어준 시인이다.
남긴 작품으로는 1925년 펴낸 시집<님의 침묵>과 시 107편, 시조 35수, 한시 164수, 소설 5편, 수필 20편, 논문 16편, 잡문 15편이 있다.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南新義州 柳洞 朴時逢方)> 백석

 

어느 사이에 나는 아내도 없고, 또,
아내와 같이 살던 집도 없어지고,
그리고 살뜰한 부모며 동생들과도 멀리 떨어져서,
그 어느 바람 세인 쓸쓸한 거리 끝에 헤매이었다.
바로 날도 저물어서,
바람은 더욱 세게 불고, 추위는 점점 더해 오는데,
나는 어느 목수 네 집 헌 삿을 깐,
한 방에 들어서 쥔을 붙이었다.

  

이리하여 나는 이 습내 나는 춥고, 누긋한 방에서,
낮이나 밤이나 나는 나 혼자도 너무 많은 것같이 생각하며,
딜옹배기에 북덕불이라도 담겨 오면,
이것을 안고 손을 쬐며 재 우에 뜻없이 글자를 쓰기도 하며,
또 문 밖에 나가지두 않구 자리에 누워서,
머리에 손깍지베개를 하고 굴기도 하면서,
나는 내 슬픔이며 어리석음이며를 소처럼 연하여 쌔김질하는 것이었다.

  
내 가슴이 꽉 메어 올 적이며,
내 눈에 뜨거운 것이 핑 괴일 적이며,
또 내 스스로 화끈 낯이 붉도록 부끄러울 적이며,
나는 내 슬픔과 어리석음에 눌리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을 느끼는 것이었다.

  
그러나 잠시 뒤에 나는 고개를 들어,
허연 문창을 바라보든가 또 눈을 떠서 높은 천정을 쳐다보는 것인데,
이때 나는 내 뜻이며 힘으로, 나를 이끌어가는 것이 힘든 일인 것을 생각하고,
이것들보다 더 크고, 높은 것이 있어서,

나를 마음대로 굴려가는 것을 생각하는 것인데,
이렇게 하여 여러 날이 지나는 동안에,

내 어지러운 마음에는 슬픔이며, 한탄이며,

가라앉을 것은 차츰 앙금이 되어 가라앉고,
외로운 생각만이 드는 때쯤 해서는,
더러 나줏손에 쌀랑쌀랑 싸락눈이 와서 문창을 치기도 하는 때도 있는데,
나는 이런 저녁에는 화로를 더욱 다가 끼며, 무릎을 꿇어보며,
어느 먼 산 뒷옆에 바우섶에 따로 외로이 서서,
어두워 오는데 하이야니 눈을 맞을, 그 마른 잎새에는,
쌀랑쌀랑 소리도 나며 눈을 맞을,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백석(白石. 1912∼1995) : 본명 기행(夔行). 평안 정주(定州)에서 출생하였다.

오산(五山)중학과 일본 도쿄[東京] 아오야마[靑山]학원을 졸업하였다. 1934년 조선일보사 출판부에 근무하였으며, 1936년 시집 <사슴>을 간행하여 문단에 데뷔하였다. 1942년 만주 안동에서 세관업무에 종사한 그는, 방언을 즐겨 쓰면서도 모더니즘을 발전적으로 수용한 시들을 발표하였다. 1945년 해방 후 북한에서 문필활동을 하다가 1963년경에 협동농장에서 사망한 것으로 전해졌으나 최근에 1995년 사망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통영(統營)>,<고향>,<북방(北方)에서>,<적막강산> 등 대표작은 토속적이고 향토색이 짙은 서정시들이다. 지방적·민속적인 것에 집착하며 특이한 경지를 개척하는 데 성공한 시인으로, 8·15광복 후에는 고향에 머물렀다. 1963년을 전후하여 협동농장에서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최근 연구자에 의해 사망연도가 1995년임이 밝혀졌다.

 

   
 

<진달래꽃> 김소월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오리다.

 

영변(寧邊)에 약산(藥山)
진달래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오리다.

 

가시는 걸음 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 밟고 가시옵소서.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

 

김소월(金素月, 1902~1934) : 본명은 김정식(金廷湜). 평북출생. 남산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오산학교와 배재고보를 나왔으며, 동경 상과대학을 중퇴했다.
오산학교때의 스승인 김억의 영향과 지도로 시를 썼으며, 시 <낭인의 봄>, <야(夜)의 우적>, <그리워>등 5편을 동인지 <창조>제 5호(1920.3)에 발표하면서 등단했다.
서른 세살 짧은 나이에 아편을 먹고 자살하기까지 그는 전통적인 민중 정감과 한(恨)의 가락을 서정시로 형상화하는데 탁월한 솜씨를 보여주어 1920년대 시단의 가장 뛰어난 서정시인으로 평가받는다. 시집으로 <진달래꽃>(1925), <소월시초>(1939), <결정판 소월시집>(1966), <완본 소월시집>(1973) 등이 있다.

 

   

<꽃> 김춘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
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 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가 되고 싶다.

  

김춘수(金春洙, 1922∼ ) : 경남 충무 출생. 니혼(日本)대 예술과 수학. 1946년 조선청년문학가 협회가 간행한 <날개>지에 <애가>를 발표하고 <온실>, <죽순>(1948), <산악>. <백민>(1949) 등을 발표하여 문단에 데뷔했다. 제5공화국에서 자신의 지론인 순수시, 무의미 시의 철학과는 정반대로 당시 민정당의 전국구 국회의원이 되어 그 '순수시의 순수성'이 지닌 불순한 의도를 의심받게 되었다. 이는 미당 서정주의 전두환 찬양 연설과 함께 당시 젊은 문학 지망생들의 분노를 자아내게 하는 희대의 사건이었다. 아시아자유문학상(1959), 예술원상, 대한민국문학상, 은관문화훈장, 소월시문학특별상(2004) 수상. 시집으로 <구름과 장미>(1948), <늪>(1950) ,<기>(1951), <제일시집>(1954), <꽃의 소묘>(1959),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1959), <타령조.기타>(1969), <처용단장>(1970)등이 있다.

 

   

<서시(序詩)> 윤동주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 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윤동주(尹東柱, 1917~1945) : 아명은 해환(海煥). 북간도 동명촌 출생. 연희전문 문과 졸업. 일본 릿교 대학, 도시샤 대학 수학. 1943년, 여름 방학 귀국 직전에 독립운동가로 체포되어 2년형을 언도받고 후쿠호카에서 복역중 옥사했다. 일제 치하에서 겪어야 했던 정신적 고통과 슬픔을, 내면 세계를 스스로 돌아보는 계기로 삼아 자아 성찰적인 시를 이루었다.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1948)가 있다.

  

   
 

<동천(冬天)> 서정주

  

내 마음속 우리 임의 고운 눈썹을
즈믄 밤의 꿈으로 맑게 씻어서
하늘에다 옮기어 심어 놨더니
동지 섣달 날으는 매서운 새가
그걸 알고 시늉하며 비끼어 가네.

 

서정주(徐廷柱,1915~2000) : 아호는 미당(未堂), 전라북도 고창출생. 1936년 <동아일보>신춘 문예에 시<벽>이 당선되어 문단에 데뷔. 1936년에 <시인부락>을 주재했다. 보들레르와 니체의 영향을 받은 듯한 초기의 시는 관능과 육체의 몸부림을 보였으나, <귀촉도>무렵부터 한국의 토속과 고전, 그리고 동양 사상으로 접근하기 시작하여, <신라초>이후부터 신라의 전통과 불교적인 세계의 심화를 보여주고 있다.

1969년, <동천>은 불교의 세계를 더욱 심화시켰고, 1973년 <서정주 문학 전집>을 간행하여 그의 시, 수필, 잡록 등을 망라하여 간행했다. 불교 이후 그의 시 세계는 샤머니즘과 예(藝)의 원초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질마재 신화>로 변해갔다.
시집에 <화사집>(1938), <서정주 시선>(1945), <귀촉도>(1946), <질마재 신화>(1975), <떠돌이의 시>(1976) 등이 있다. 유치환과 더불어 생명파로 알려져 있다.

  

   
  

<농무(農舞)> 신경림

 

징이 울린다 막이 내렸다.
오동나무에 전등이 매어달린 가설 무대
구경꾼이 돌아가고 난 텅 빈 운동장
우리는 분이 얼룩진 얼굴로
학교 앞 소줏집에 몰려 술을 마신다.

  
답답하고 고달프게 사는 것이 원통하다.

꽹가리를 앞장세워 장거리로 나서면
따라붙어 악을 쓰는 건 쪼무래기들 뿐
처녀애들은 기름집 담벽에 붙어 서서
철없이 킬킬대는구나.

  

보름달은 밝아 어떤 녀석은
꺽정이처럼 울부짖고 또 어떤 녀석은
서림이처럼 해해대지만 이까짓
산구석에 처박혀 발버둥친들 무엇하랴.

  

비료값도 안 나오는 농사 따위야
아예 여편네이게나 맡겨두고
쇠전을 거쳐 도수장 앞에 와 돌 때
우리는 점점 신명이 난다.

  

한 다리를 들고 날라리를 불꺼나.
고개짓을 하고 어깨를 흔들거나.

  

신경림(申庚林 .1935∼ ) : 충북 청주 출생. 동국대 영문과 졸업. 1959년 <문학예술>에 시 <갈대>가 추천되어 문단에 데뷔. 1974년 제1회 만해 문학상, 1981년 제8회 한국 문학 작가상, 1990년 이산 문학상을 수상하였다.

제1회 만해문학상(1974), 제8회 한국문학작가상(1981), 제2회 이산문학상(1990), 제8회 단재문학상(1994), 현대불교문학상, 4ㆍ19문화상, 은관문화훈장 수상. 시집으로 <농부>, <달넘새>, <가난한 사랑노래>, <길> 등이 있다.

 

   
  

<향수(鄕愁)>  정지용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비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베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아란 하늘 빛이 그리워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려
풀섶 이슬에 함초롬 휘적시던 곳.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전설(傳說) 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벗은 아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줍던 곳.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하늘에는 성근 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돌아앉아 도란도란거리는 곳.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정지용(鄭芝溶,1902~?) : 충북 옥천 출생. 휘문고보 졸업. 일본 도지샤 대학(同志社大學) 영문과 졸업. 귀국후 휘문고보 영어 교사로 재직했으며 광복 후에는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수로 재직했다. 1950년에 한려수도를 여행중 전란을 맞아 북한군에 붙잡혀 행방 불명되었다.

동인지<요람>을 발간하면서 <향수>, <슬픈 인상화>, <풍랑몽> 등을 발표했다.
[시문학]동인이었으며 섬세하고 감각적인 시어와 선명한 이미지를 구사하여, 1930년대 시이 모더니즘을 대표하는 사람으로 평가받고 있다.
첫 작품인 <카페프란스>, <슬픈 인상화>, <파충류 동물> 등을 경도 유학생잡지 <학조>(1926)창간호에 발표했다.
후기 시집인 <백록담>은 지성의 절제, 토착어의 순화,선명하고 정확한 이미지 등을 바탕으로 한 이미지즘 경향의 작품집이다.
박목월,조지훈,박두진,박남수 등을 <문장>지를 통해 추천하였고, 이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준 시인이다. 시집에 <정지용시집>(1935),<백록담>(1941)등이 있다.

 
   


<나그네> 박목월
 
강나루 건너서 밀밭 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길은 외줄기 남도(南道) 삼백 리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박목월(朴木月, 1916∼1978) : 경북 경주 출생. 본명은 영종(泳鍾). <문장>지에 <길처럼>,<연륜>(1939)등이 추천되어 본격적인 창작활동을 시작했다. 조지훈, 박두진 등과 더불어 <청록집>(1946)을 간행하여 청록파 시인으로 잘 알려져 있다.

자연을 배경으로 애절한 서민의 정서를 민요조 가락으로 읊었으며, 이후 따스한 가족적 유대의 시를 남기고, 만년에는 신앙에 깊이 침잠하는 모습을 보였다. 시 잡지<심상>을 간행했고, 1955년 아시아자유문학상 수상, 1968년 대한민국문학상 본상 수상, 1974년 한국시인협회회장을 역임했다.
동요집 <박영종 동요집>(1946), 동시집 <초록집>(1946)이 있으며, 시집으로는 <산도화>(1955), <난.기타>(1959), <산새알 물새알>(1962), <청담>(1964), <경상도 가랑잎>(1968), <무순>(1976)등이 있고, 자작시 해설집으로 <보랏빛 소묘>가 있다.

 

   
  

▼ 한국 현대시 100년 흐름도 

출처 : http://www.donga.com/photo/news/200712/200712310020.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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