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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한국인칼럼

어머니 몸 안에 바다가 있었네

이어령의 한국인 이야기 <3> 탄생의 비밀

③ 어머니 몸 안에 바다가 있었네


[중앙일보 이어령] 상상력이 풍부한 시인들은 바다에서 어머니를 본다. 한자의 바다 해(海)자에는 어머니를 뜻하는 모(母)자가 들어있기 때문이다. 프랑스말도 그렇다. e의 철자 하나만 다를 뿐 바다도 어머니도 다같이 ‘라 메르’라고 부른다. 거기에 인당수 바닷물에 빠져 거듭 태어나는 심청이 이야기, 실험관의 인조인간 호문클루스가 갈라리아의 바다에 떨어져 생명의 기원으로 돌아가는 괴테의 『파우스트』, 그리고 또 “내 귀는 소라껍질 바다 소리를 그리워한다”는 장 콕토의 시에 이르기까지 실로 그 예를 들자면 끝이 없을 것이다. 나 자신도 ‘어머니를 위한 여섯 가지 은유’에서 “생명의 시원인 모태는 태초의 바다”라고 쓴 적이 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과학자들도 그와 똑같은 말을 한다는 것이다. 그것도 그냥 바다가 아니라 20억 년 전 최초의 생명 세포를 태어나게 한 태고의 바다라고 한다. 이유는 그 바닷물과 어머니의 자궁 속 양수의 성분이 비슷하고 거기에서 생명의 기적들이 생겨나고 있기 때문이다.

해수(海水)와 양수(羊水)의 미네랄 화학기호를 들여다보고 있으면 겨자씨만 한 태아(胎芽)가 되어 어머니의 자궁 속 바다를 떠다니는 내 모습이 떠오른다. 태고의 그 바다는 어둡지만 참으로 고요하고 아늑했을 것이다. 하루에 일 밀리미터씩 자란다는 수정란의 미생물에서 수아가미와 지느러미가 달린 물고기 모양으로 변해간다. 지구 생물의 진화과정으로 본다면 10억 년의 세월이 지나간 셈이다. 그 지느러미가 손과 발이 되고 폐가 생겨나면 물고기였던 나는 도롱뇽 같은 양서류로 변신한다. 정말 손가락 사이에 물갈퀴 같은 흔적도 남아 있다. 그러다가 드디어 손톱, 발톱이 생기기 시작하면 나는 어느새 쥐와 같은 포유류가 되고 그 몸에 뽀얀 잔털이 자라면 영장류의 원숭이 모습으로 진화한다. 그래도 인간이 되려면 아직 수백만 년이 지나야만 한다. 그래야만 나는 세상 밖으로 나갈 수가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내가 읽은 어떤 서사시도 이렇게 스케일이 크고 놀라운 변신의 드라마를 보여준 적이 없다. 생물학자들의 말이 거짓이 아니라면 우리는 어머니의 바다(양수) 속에서 20억 년, 더 올라가면 40억 년의 기나긴 생물의 계통 발생 과정을 단 10개월 만에 치렀던 것이다. 상상이 되는가. 너나 할 것 없이 빛의 속도로 질주해도 불가능한 그 길고 긴 생명의 여정을 거쳐서 우리는 이 한국 땅에 안착한 사람들이다. 다만 그것을 우리가 모르고 있을 뿐이다.

신화의 관점으로 보면 우리는 동굴 속의 곰이었지만 생물학적 관점으로 보면 바다에 떠 있는 작은 미생물이었다. 한국인이기 전에 먼저 인간이었고 인간이기 전에 원숭이와 쥐와 도롱뇽과 그리고 바다의 물고기였다. 그 바다 생물 중에서도 자신을 보호할 껍질은 물론 가시조차 없었던 척색(脊索)생물 피카이어였다는 게다. 못된 바다의 포식자 노티라스의 먹이로 쫓겨 다니다가 물고기로 진화하고 개구리 같은 양서류가 되어 헐레벌떡 육상으로 올라와 파충류와 포유류의 선조가 된 인간의 먼 핏줄이라 했다. 만약 피카이어가 절멸했더라면 우리들 인간도 태어나지 못했을 것이라고 한다. 포식자들에 쫓겨 다니던 물고기 한 마리가 바다에서 육지로 올라오는 슬프고 이상한 생명의 이야기가 어머니의 양수 속에 숨어 있었던 것이다.

태아들도 꿈을 꾼다는 데 그게 사실이라면 우리는 그때 무슨 꿈을 꾸었을까. 지상의 꿈과는 분명 다른 꿈이었을 거다. 프로이트 박사의 분석으로는 도저히 설명 불가능한 순수한 꿈, 초록색 바다의 꿈이 아니면 그냥 하얀 꿈이었을지 모른다. 축제의 불꽃처럼 일시에 생물들이 터져나온 캄브리아기의 바다 꿈이었을까. 그보다도 먼 우주 대폭발의 하늘 꿈이었을까. 분명한 것은 어머니의 몸 안에 바다가 있었다는 것과 그 태아들도 그 안에서 꿈을 꾸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것을 잘 기억해 주기 바란다. 한국인 이야기를 하는데 두고두고 되풀이될 중요한 화두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