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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한국인칼럼

왜 울며 태어났을까 ④

④ 왜 울며 태어났을까 [중앙일보]

 

 

태어나자마자 아이들은 왜 큰 소리로 우는가. “바보들만 사는 당그란 무대에 타의에 의해 끌려나온 것이 억울하고 분해서 그랬을 것”이라고 셰익스피어는 풀이했다. 과연 대문호다운 상상력이다. 하지만 한 가지 씻을 수 없는 실수를 했다. 아이들이 타의에 의해 끌려 나왔다는 그 대목이다. 태아들은 바깥 세상으로 나가기 위해서 호흡운동을 하고 걸음마의 다리운동까지 한다. 이렇게 충분한 준비를 다 마치고 나서야 여행을 떠날 마음을 갖는다. 그 깜깜한 암흑 속에서도 출구의 산도를 용케 알고 그 방향으로 머리를 돌린다. 달력도 시계도 출생을 가르쳐 줄 학원 선생도 없는 나 홀로 공간에서 이 모든 것이 스스로의 힘으로 이루어진다.

오히려 출산일을 모르는 것은 산모 쪽이다. 배 속에 든 아이가 사인을 보내 진통이 시작되기 전까지는 분만일이 온 것을 눈치채질 못한다. 초음파로 태내를 환히 훑어보는 산부인과 전문의도 아이가 언제 나올지 정확한 일시를 모른다.

그래서 이따금 구급차 안에서 몸을 푼 산모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셰익스피어 같은 멍청한 말을 되풀이하지 않을 것이다. 사주팔자 타고난다고 하지만 그 운명의 날을 선택한 것은 바로 배 안에 있는 ‘나’다. 오히려 진짜 분하고 억울해서 우는 것은 셰익스피어 시대의 아이들이 아니라 인공 분만에 의해 억지로 끌려 나온 요즘 아이들일 것이다. 제왕절개의 인공 출산이 얼마나 큰 폭력인가를 아이들은 분명히 알고 있을 것이다.

고고(呱呱)의 성(聲)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일까. 그것은 들이마시는 호흡작용으로 닫혀 있던 폐벽이 열리는 소리다. 그리고 그 최초로 들이마신 숨이 생을 마칠 때 마지막 내쉬는 날숨으로 이어지는 한 호흡이 다름 아닌 우리의 삶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 험난하고 허무한 세상으로 나가려고 목숨을 걸며 비좁은 산도를 빠져나오는 모험을 했다. 양수가 터지는 탄생의 순간 행복의 바다, 평화의 바다는 사라진다. 어머니의 심장 박동을 파도소리로 듣던 태아의 추억은 멈춘다. 아이의 출산이란 바다에서 육지로 상륙하는 것이다. 그때 터뜨리는 울음소리야말로 수억 년 전 바다에서 육지를 향해 상륙했던 생물들의 울부짖음과 같은 것이다.

그들이 왜 편한 바다를 버리고 모래와 용암밖에 없는 불모의 육지로 올라왔는지. 포식동물들로부터 피난처를 구하기 위한 것이라는 단순한 이유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그 무엇인가의 신비한 힘이 있었던 것 같다고 진화론자들은 말한다. 정든 곳을 버리고 미지의 공간으로 나가려는 생명의 의지, 논리만으로는 풀 수 없는 어떤 고통에 대한 모험과 도전, 그것이 탄생의 비밀이라는 것이다. 이쯤 되면 그게 진화론인지 킬리만자로의 산꼭대기에서 얼어 죽은 표범 이야기를 하는 헤밍웨이 소설인지 분간할 수 없다.

태아의 추억을 되살릴 수 있다면 그때 우리는 이렇게 말했을는지 모른다. “나는 내가 태어나고 싶은 날에 태어났다. 나의 생일날은 내가 선택한 가장 성스러운 날이며 어머니의 바다를 떠나 육지로 상륙한 고난의 기념일이다. 나는 그날 총탄이 날아오는 육지를 향해 단신 상륙작전을 펼쳤다. 그리고 성공을 했을 때 내 아가미는 허파로 변해 있었고 그 허파는 풍금처럼 상실한 바다와 새로 만난 대륙을 향해 울리고 있었다. 진통이 끝난 어머니는 미소를 지으며 그 고고의 성을 들었으며 다음에 태어날 아이들의 바다를 준비하기 위해서 가장 청정한 바다에서 딴 미역국을 부지런히 드시고 계셨다.”

그러니까 바다에서 뭍으로 상륙한 우리 신생아들은 용감한 해병대요 영원한 해병대였던 것이다.

산모는 출산을 통해 자연의 큰 힘과 그 지혜를 배운다고 했다. 어찌 여성만의 일이겠는가. 탄생의 비밀을 통해 우리는 대륙으로 올라온 생명의 바다를, 생물학과 시학이 하나로 합쳐진 지혜의 책을 읽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