⑤ 한국인은 한 살 때 태어난다
“나는 한 살 때 태어났습니다.” 장용학의 소설 ‘요한시집’ 첫 줄에 나오는 대목이다. 당연한 소린데도 아주 참신한 충격을 준다. 그래, 정말 그래. 우리는 태어나면서 한 살을 먹었지. 나는 양력으로 12월 29일 태어나서 이틀 만에 두 살을 한꺼번에 먹은 사람이다. 하지만 비웃어야 할 것은 우리가 아니라 태어난 아이를 0살부터 정확히 계산하는 서양 사람들이다.
그것은 일 년 가까이 어머니 배 안에서 열심히 살아온 태아의 존재를 무시하는 처사이기 때문이다. 걸핏하면 과학이요 합리성이요 라고 따지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제 나이 헤아릴 줄도 모르는가. 공장에서 나온 물건이라면 출고 날짜부터 따지는 게 당연하겠지만 눈·코·입을 달고 나온 아이들은 부품들을 꿰맞춘 TV 상자가 아니다.
19주째만 되어도 벌써 태아 손에는 평생 변하지 않는다는 지문이 생기고 손금이 잡힌다. 손금을 보는 사람은 태내 생활을 통해 앞날의 운명을 비춰보려는 것과 같다. 배 속에서부터 왼손가락을 빠는 아이들에게 왼손잡이가 많다는 것은 영국의 실험 결과에서도 드러나 있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가 아니라 이제부터는 ‘태내 버릇 백 살까지 간다’는 새 속담이 생겨날 판이다.
“태내에서부터 성인병이 시작된다”는 데이비드 버커의 책을 읽고 감동한 사람이라면 “나는 한 살 때 태어났습니다”라고 한 한국 작가의 소설에도 박수를 보낼 것이다. 현대소설은 고사하고 판소리 ‘심청가’를 들어보면 왜 한국 사람들이 태아의 나이까지 계산했는지 실감하게 될 것이다. 앞 못 보는 심 봉사는 태어난 아이가 아들인지 딸인지 몰라서 손으로 더듬어봐야 했지만, 그 애가 열 달 동안 어떻게 어머니 배 속에서 자랐는지는 초음파 사진을 찍듯 훤히 들여다본다.
그것이 중중모리 신가락으로 읊어대는 “사십에 점지한 딸 한두 달에 이슬 맺고……”로 시작하는 심청이 출산 대목이다. 첫 대목부터 우리의 마음을 끄는 것은 정자·난자가 결합하는 것을 “이슬을 맺는다”고 한 촉촉하고 정감 있는 표현이다. 석 달에는 그 이슬에 피가 어리고, 넉 달에는 인형(人形·사람 모양)이 생긴다. 다섯 달과 여섯 달에는 오포(五包:간장·심장·비장·폐장·신장)와 육점(六點:담·위·대장·소장·삼초·방광)이 생겨난다고 묘사한다.
재미난 것은 여섯 달까지는 맺고 어리고 생겨난다고 하다가 일곱 달부터는 그 달수의 운에 맞춰 모두 열리는 것으로 바뀐다. 칠 개월에는 칠규(七竅)가 열리고 구 개월이 되면 구규(九竅)가 열리고, 열 달째는 금강문·하달문·뼈문·살문의 모든 자궁 문이 열리면서 아이가 태어난다. 일곱에서는 일곱 수의 얼굴 구멍이 아홉에서는 하체의 두 구멍을 합친 아홉 수의 구멍이 열린다는 것도 짝이 맞지만 열 달에는 자궁문이 모두 열린다는 것도 딱이다.
일곱 수부터 모두가 ‘ㅇ’의 열린 모음으로 시작하는 한국말도, 그리고 정말 ‘열’에서 ‘열리’는 자궁문도 절묘하다. 과학의 정밀성과는 또 다른 시의 정교함이다.
과학적 관점으로 봐도 태아들은 일곱 달부터 듣고 느끼고 기억하기 시작한다. 감각이 열리고 뇌가 발달한다. 이때 태명(胎名)을 계속 불러주거나 같은 음악을 되풀이해 들려주면 태어난 뒤에도 산아들은 반응을 보인다는 것이다. 한 개의 수정란에서 42사이클의 세포분열을 되풀이하면서 자라던 태아가 이 세상 밖으로 나온 뒤에는 겨우 5사이클로 줄어들면서 어른으로 성장한다. 탄생 전에 우리 몸은 거의 다 만들어진 것이나 진배없다.
태아 의학이나 주산기학(週産期學)의 발달로 태내의 많은 신비가 풀어지면서 나이는 태아 때부터 계산하는 것이 합리적이요 과학적이라는 것이 밝혀지기 시작한다.
작은 일 같지만 이것이 서양인과 동양인의 사고 체계를 가르는 중요한 철학의 랜드마크다. 인간과 생명과 자연을 보는 차이가 바로 이 연령 계산법에서 상징적으로 드러난다. 최첨단 자기공명 기기라 할지라도 앞 못 보는 심 봉사를 따르지 못하는 이유는 예나 지금이나 생명공간을 들여다 보는 것은 렌즈도 수정체도 아니요 ‘마음의 눈’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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