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상 앞의 한국인 ①
인터넷 블로거 뉴스에 아사다 마오는 그 사주(四柱) 때문에 김연아를 절대 이길 수 없다는 글이 올라와 있다. 두 선수는 모두 경오(庚午)년 백말띠이고 달수는 갑신(甲申)과 을유(乙酉)이다. 태어난 날은 계유(癸酉)와 계사(癸巳)인데 20일의 차이가 있지만 모두 계(癸)의 일간이 들어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김연아는 갑(甲)목을 손과 발로 쓰고 마오는 을(乙)목을 손과 발로 쓴다는 거다. 더 이상 사주풀이를 들으려 하지 말자. 김연아가 이긴 것은 운을 타고 나서라는 말밖에는 되지 않으니 말이다.
궁금한 것은 그 블로그 뉴스가 베스트에 뽑히고 클릭 수가 만만찮다는 데 있다. 하기야 좋다는 사주 날짜 받아놓고 제왕절개로 아이를 낳는 세상이니 무엇을 더 말하겠는가.
원래 사주팔자란 태어난 해(年) 달(月) 날(日) 시(時)를 ‘네 기둥’(四柱)으로 표현하고 그것을 두 자로 된 간지명(干支名) 여덟 글자(八字)로 나타낸 말일 뿐이다. 그래서 점복과 관계없이 한 개인의 차이성을 나타내는 ID라고 생각하면 된다.
유럽에서는 중세 때부터 이미 생년월일을 개인의 신분을 확인하는 가장 중요한 방법으로 여겨왔다. 이름과 주소는 바뀌어도 생년월일은 일생 동안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프랑스 역사학자 필리프 아리에스는 언젠가는 생년월일 숫자를 시민 전체가 등록하는 날이 올 것이라고 했다. 기뻐해야 할지 서러워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그 예언이 이루어진 곳이 바로 한국이다. 사주팔자를 시(時)만 빼고 숫자로 고치면 우리가 무덤까지 갖고 갈 주민등록증 번호의 앞자리 여섯 숫자가 생긴다. ‘사주팔자’가 ‘삼주육자’로 바뀐 셈이다.
사주의 여덟 글자가 한국인에게 각별한 의미를 띠게 된 것은 그만큼 운명론자들이 많아서가 아니다. 이름도 남이 지어준 것이고 태어난 장소도 이사를 가면 그만이지만, 태어날 때 가지고 나온 사주 날짜만은 누가 뭐래도 자기만의 것이다.
그런데 그 정체성마저 호적부에 오르는 순간 위태로워진다. 왕의 시간, 황제의 시간, 국가의 시간에 흡수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그것이 연호(年號)라는 것이요, 기원(紀元)이라는 특수 문자다. 실제로 내 생일은 음력과 양력 그리고 호적에 등재된 것으로 지리멸렬되어 있다. 무엇보다 심각한 것은 출생 당시 호적에는 ‘소화(昭和) 8년생’으로 기록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그것이 해방된 뒤에는 단기, 근대화 이후에는 서기로 표기 방식이 달라진다. 아마 북한 땅이었다면 내 출생일은 주체 23년으로 기록되었을 것이다. 이게 바로 역사의 시간, 카이저들의 시간이라는 게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다. 깃발의 시인 청마(靑馬) 유치환은 시 ‘출생기’에서 “융희(隆熙) 2년, 나를 잉태하신 어머니”라고 썼다. 같은 한국 사람인데 한 사람은 조선왕조 마지막 임금 순종(純宗)의 연호로, 또 한 사람은 일본제국의 ‘천황’의 연호를 탯줄처럼 감고 태어난 것이다. 작가 이병주는 다섯 개의 이름을 갖고 살았던 한국 젊은이의 비극을 소설화했지만, 그보다 더한 것이 융희, 소화, 단기, 서기로 그 명칭이 바뀌어 간 단절과 혼란의 역사라 할 것이다.
그런데 역사의 시간을 개인 사주의 간지로 바꾸면 사정은 달라진다. 융희 2년은 정미생(丁未生)이 되고 소화 8년생은 계유(癸酉)생으로 변한다. 어지러운 역사 속에서 “그래도 계절만은 천년을 다채하여 지붕에 박넌출(넝쿨) 남풍에 자라고 푸른 하늘에 석류꽃 피 뱉은 듯 피어”의 ‘출생기’의 한 시구절 같은 “그래도”의 시간, “천년의 다채한 시간” 내 생명과 자연과 우주의 시간이 열린다. 아무리 낡고 황당한 주역이나 당사주책(唐四柱冊)이라도 신이라고 일컫던 ‘천황폐하’보다 내 띠인 닭이 먼저다. 아니다. 거기에는 카이저의 절대 권력도 틈입할 수 없는 나의 시간, 하늘의 시간이다. 아무리 소화 8년 황국신민으로 포장하려고 해도 나는 태양보다 먼저 어둠 속에 빛을 토하는 닭띠 계유생으로 이 땅에 태어났다. 경오년생 김연아가 국적이 다른 아사다 마오와 은반 위에서 머리칼을 나부끼며 백마처럼 달려오고 있는 시간, 둥글게 둥글게 순환하는 띠의 시간, 영원히 지속하는 시간 그 고리 위의 네 기둥이 한국인들을 지켜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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