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신춘문예 당선작
바람의 산란/배경희(서울신문)
모든 것이 사라져도 바람은 존재한다
수천 년 살아있는 혼들의 화석처럼
떠돌며 우리의 삶 속에 잔뿌리를 내린다
당신은 허공 속의 자궁에서 태어난다
힘들고 지친 자들의 울음을 파먹으며
온몸을 먹구름 속에 수없이 휘어가며
밤새 비 쏟아지고 나무를 두드렸던
바람 새들 불러 모아 한바탕 쓸고 간
마당엔 햇살 물고기 푸륵푸륵 뛰논다
[당선소감]
“방황하는 난 늘 뒤에 있었다”
현재 진행형, 내면의 방황을 하면서 늘 나는 뒤에 있었습니다. 어릴 적 대추나무 아래서 어머니를 온종일 기다렸던 시간들, 먼 한천 내를 바라보면서 질경이를 질기도록 뜯었던 시간들, 한천 둑방길을 끝없이 걸었던 시간들, 그러한 기억들이 저를 있게 한 힘이었습니다.
지금도 어렴풋이 생각이 납니다. 아무도 없는 마당 위 햇빛 재잘거림과 나무의 그림자가 커졌다 작아졌다 하는 한낮은 구름 양떼를 이끌고 돌아온 하늘 집이었습니다.
그 그리움으로 외로움을 지탱하며 시를 습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그 시절 도종환 선생님, 송찬호 선생님께서 큰 힘을 주셨습니다. 그 길을 근근이 걸어 온 10년이라는 세월, 저의 시는 더뎠습니다.
우연히 정수자 선생님 시조를 읽고 느낀 시조의 깊이와 여백의 미. 그것은 큰 나무가 되기 위해 잔가지를 치는 것 같았습니다. 시조는 격이 있는 나무였습니다. 그 격조와 함께하고 싶었습니다. 취미 삼아 그림 붓질을 해온 터이지만, 시조는 그림과 다른 위안과 힘을 주었습니다. 시조는 길가에 핀 들풀이나 풀잎에 맺힌 물방울, 그 안에 숨은 우주를 보는 것, 징을 울릴 때의 파문, 울림 같은 것이었습니다.
파편 속에서 전체를 볼 수 있는 마음을 기르겠습니다. 갈 길이 멀지만 그만큼 더 노력하겠습니다. 부족하고 더없이 부족한 저를 격려하고 이끌어 주신 수자 선생님, 그리고 보이지 않게 성원해준 우리 가족과 부모님께 감사드리고, 선정해주신 심사위원님들과 서울신문사에 감사드립니다.
■ 약력
-1967년생 충북 청원 출생
-2009년 7월 중앙일보 시조 장원
[심사평]
이미지와 정형미의 융합
문단의 지형도에 첨예한 서슬과 싱그러운 기세를 불어넣는 것이 신춘문예이다. 시조 부문에서는 해마다 응모작이 수적으로 늘어나고 문학적 성취도 높아지고 있다.
가장 반가운 움직임은 견고한 천년의 내력을 간직한 시조에 바로 지금 시점의 생기 도는 감각을 선사함으로써 새로운 심미를 탐색하고 있는 시도들이다.
당선작에 선정된 배경희의 ‘바람의 산란’은 감수성이 흐드러진 시상을 펼치는 가운데 시조만의 정형 또한 탄탄하게 지키고 있다.
이러한 조합을 기반으로, 시적 이야기를 매끄럽게 전개시킨 것도 주시할 만하다. 인간의 삶을 ‘바람’으로 투영하는 과정에서, 실체 없는 심상을 선연한 이미지로 옮기고 있어 부단한 생각의 깊이와 무게가 느껴지며, 가락을 유희하는 듯이 구성한 정서의 흐름이 노련하다.
최종심에 오른 후보작은 강연숙의 ‘청자상감범나비-애벌레의 꿈’, 송필국의 ‘새하얀 삘기꽃만 눈발처럼 흩날리고-장 프랑수와 밀레의 이삭줍기’, 장은수의 ‘새의 지문’, 김대룡의 ‘우항리를 지나며’, 이상근의 ‘그림 일기’ 등이다.
이미 각자 뛰어난 특질을 갖추고 있으므로, 내면 세계에만 머무르지 않는 소통의 시어를 찾으며 장르에 부합할 정형미를 가다듬고, 소재와 묘사에 접근하는 발상을 과감히 바꾼다면 모두가 시조 시단의 놀라운 기량이 될 것으로 믿는다. (한분순,·이근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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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혹은 목련/박해성(동아일보)
앙가슴 하얀 새가 허공 한 끝 끌고 가다
문든 멈춘 자리
매듭 스롯 풀린 고요
콕 콕 콕
잔가지마다 제 입김 불어넣는
그 눈빛 낯이 익어 한참 바라봤지만
난시가 깊어졌나.
이름도 잘 모르겠다
시간의
녹슨 파편이 낮달로 걸린 오후
은밀하게 징거맸던 앞섶 이냥 풀어놓고
곱하고 나누다가
소수점만 남은 봄 날
화르르!
깃 터는 목련, 빈손이 사뿐하다
[당선소감]
지독한 불면의 실마리 이제야 겨우 잡힐 듯
아침에 눈을 뜨고 냉수 한 컵 마십니다, 비수처럼 서늘히 가슴에 꽂히는 한강 줄기! 웅녀가 마셨던 그 강물이 내 몸을 깨웁니다. 이제야 겨우 잡힐 듯한 지독한 불면의 실마리, 그게 바로 시였습니다. 신전의 대리석 기둥같이 나를 지탱해주는, 아니 저항할 수 없는 견고함으로 나를 압도하는 나의 천국, 나의 지옥 그리고….
아버지, 당신의 바람 같은 자유를 증오했고 출구 없는 가난을 저주했으며 타협할 줄 모르는 우직함을 원망했었지만 대책 없이 당신을 닮은 딸이 이 허허한 벌판에 맨발로 섰습니다. 오늘은 따듯한 그 등에 업혀 아이처럼 실컷 울고 싶습니다.
나의 첫 번째 독자이자 절대 팬인 남편 이조훈 님에게 이 영광을 드립니다. 사랑하는 딸 명휘 승휘, 아들 승규와 새로이 가족이 된 티머시 미드와 배지현에게 부끄럽지 않은 시인이 되리라 다짐합니다. 6년의 습작기간을 채찍질해 주신 지도교수님과 동행한 문우들에게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내 문학의 모태가 되어준 경기대학교 국문학과에 빛이 있기를!
졸작을 뽑아주신 심사위원님께 고개 숙여 경의를 표합니다. 고루한 편견 없이 평등의 정의를 실천하는 동아일보에서 희망을 읽습니다. 누군가에게 빛과 소금이 되는 ‘사람’이고자 노력하겠습니다.
[심사평]
모국어의 가락을 가장 높은 음계로 끌어올리는 시조의 새로운 가능성을 신춘문예에서 읽는다. 올해는 더욱 많은 작품이 각기 글감찾기와 말맛내기에서 기량을 보이고 있어 오직 한 편을 고르기에 어려움을 겪는 즐거움이 있었다.
‘에세닌의 시를 읽는 겨울밤’ (이윤훈)은 서른 나이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러시아 시인의 이름을 빌려 자작나무 숲이 있는 겨울 풍경 속으로 끌고 들어가고 있는데 시어의 새 맛이 덜 나고 ‘새로움에 대한 사색’ (송필국)은 고려의 충신 길재의 사당 ‘채미정’을 소재로 생각의 깊이를 파고들었으나 한문투가 거슬렸다. ‘널결눈빛’ (장은수)은 해인사 장경판전의 장엄을 들고 나왔으나 글이 설었으며 ‘빛의 걸음걸이’ (고은희)는 말의 꾸밈이 매우 세련되었으나 이미지를 받치는 주제가 미흡했고 ‘도비도 시편’ (김대룡)은 지금은 뭍이 된 내포의 한 섬을 배경으로 역사성을 갈무리해서 완성도를 보였으나 내용과 형식의 새로운 해석을 얻지 못했다.
당선작 ‘새 혹은 목련’(박해성)은 ‘왜 시조인가?’에 대한 분명한 답을 주는 작품이다. 역사적 사물이나 자연의 묘사가 아니더라도 현대시조로서의 기능을 오히려 깍듯이 해낼 수 있다는 가능성을 활짝 열고 있다. 감성의 붓놀림과 말의 꺾음과 이음새가 시조가 아니고는 감당 못할 모국어의 날렵한 비상이 맑은 음색을 끌고 온다. 더불어 시인의 힘찬 날갯짓을 빈다.
(이근배 시조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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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와 바다/조춘희(경남신문)
아버지,
수면을 두드리지 마세요
수평의 긴장을
간신히 지탱하는
해저의
섬과 섬 사이
안간힘을 보세요
아버지,
낚싯줄을 던지지 마세요
거멀못 박아둔 자리
새물이 차올라
파도는
푸른 비린내
바다를 토막내어요
아가야,
염려말고 바다를 보아라
달을 안고 뒤척이는
바다의 설렘을
지금 막
사랑을 품고
마음 붉어지는 찰나란다
[당선 소감]
파도의 리듬을 닮은 시조 쓸 것
바다가 잉태한 섬, 그 섬에 태생을 둔 저는 바다의 언어로 서정을 배웠습니다. 문학을 하겠다고 무작정 뭍으로 나왔으나 바다의 언어는 자주 길을 잃었습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에는 문학을 하겠다는 당찬 자신감마저 잃은 채 휘청거리기도 했습니다. 바다의 언어만으로는 세상과 소통할 수 없겠다는 좌절을 느낄 즈음 전화를 받았습니다. 그건 흡사 나의 서정도 소통될 수 있다는 천명(天命)을 받은 것처럼 설레는 일이었습니다. 아마도 그 순간, 사량도의 바다도 출렁, 했겠지요? 무덤 속의 할머니도 덩실, 춤을 추셨겠지요?
제가 여전히 뭍에서 바다를 말할 수 있는 것은 바다의 태생을 물려주신 부모님께서 아직도 그 섬, 사량도에 계시는 덕분입니다. 제가 누릴 기쁨이 있다면, 그것은 온전히 딸의 느린 걸음에도 재촉하는 법이 없으신 부모님께 돌려야 할 몫일 겁니다. 늘 문학을 꿈꿨으나 현실의 짐과 바꿀 수밖에 없었던 언니와 이제 막 결혼을 한 오빠, 그리고 내 동생 영석과 형부의 응원에 감사합니다. 뭍에서 사는 법을 일러주시는 민병기 교수님과 김정자 교수님께도 감사드립니다. 멋모르던 어린 시절 시조의 존재를 일러주신 김형진 선생님께도 감사드립니다. 무엇보다 멈춰 서 있던 제 삶에 신발을 신겨주신 심사위원 선생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설렘 한편에는 팽팽한 긴장감 같은 것이 있어 덜컥, 겁이 나기도 하지만, ‘파도의 리듬을 닮은 시조’, 그 다양한 소통방식을 모색해서 좋은 작품을 쓰는 ‘건강한’ 작가가 되겠습니다.
△1980년 통영 사량도 출생 △부산대 국어국문학과 박사과정 수료 △2002년 창대문학상(시) 당선 △2003년 동아문학상(소설) 당선 △2004년 부대문학상(소설) 당선 △현 창원대 강사
[심사평]
음보와 운율 솜씨 있게 갈무리
새해 벽두, 한국시조단의 축하 속에서 미래를 열어갈 또 한 사람의 신예를 배출한다는 생각에 심사는 진중할 수밖에 없었다. 경남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한 문인들은 경향각지에서 나름의 빛깔과 개성으로 괄목할 만한 활약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전통 계승과 한국문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갈 신예를 뽑는 일이라는 점에서 어깨가 더욱 무겁다.
대부분의 응모작들이 일정부분의 성취를 보이고 있었고 치열한 습작의 흔적을 보여주고 있었다. 하지만 심사위원의 눈길을 사로잡을 만한 군계일학의 작품에 대한 갈증은 여전히 남는다. 신춘의 고고성을 울리며 기존의 시조단에 무거운 질문을 던지거나 날카로운 필치로 폐부를 파고드는 신인다운 패기를 기대한 때문이다.
시조는 응축의 문학이다. 짧은 3장 6구라는 정형 속에 얼마나 알맞게 시상을 가다듬느냐 하는 것이 관건이다. 시상은 넓게 원심력을 그려야 하고, 언어는 구심력에 의지해 내적으로 단단한 구성을 취해야 한다.
마지막까지 선에 오른 작품은 ‘오래된 것에 대한 변명’, ‘겨울나무의 수사학’, ‘아버지와 바다’ 세 편이었다.
‘오래된 것에 대한 변명’은 신춘문예의 특성에 근접한 작품이다. 우선 낡은 음풍농월에서 벗어나 현대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것이 좋았다. ‘유효기간 지난 지갑’ 같은 따뜻한 시선이 눈길을 끌었으나 앞서 말한 시어의 중복이 전체적인 탄력을 얻지 못한 아쉬움을 남기고 있다. ‘겨울나무의 수사학’은 상당한 내공이 엿보인다. 섬세함과 강건함을 동시에 지니는 장점들이 있어 충분한 가능성이 엿보였으나 ‘그날 그 짙은 그리메 낮달 뒤로 사위고’ 같은 추상적인 표현들이 거슬렸다.
‘아버지와 바다’는 3수의 작품으로 퍽 안정된 느낌을 준다. 첫 수에서 섬과 섬 사이의 안간힘이 수평의 긴장을 지탱하는 동력임을 말하고, 둘째 수에서는 낚싯줄로 잔잔한 바다의 균형이 깨지는 상황을 연출한다. 다시 셋째 수에서는 길항 관계인 아버지와 바다가 서로를 품어 안으며 화해를 시도한다. ‘바다의 설렘’, ‘사랑을 품고’ 같은 직설적 언어가 거슬리긴 하지만 음보와 운율을 갈무리하는 솜씨에 신뢰가 간다.
심사위원은 이 세 편 중 조춘희씨의 ‘아버지와 바다’를 당선작으로 민다. 당선자에게는 축하를 보내고, 선전한 두 분에게는 재도전의 발판이 되길 빈다. (김연동, 이달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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