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시
이시영
어서 오라 그리운 얼굴
산 넘고 물 건너 발 디디러 간 사람아
댓잎만 살랑여도 너 기다리는 얼굴들
봉창열고 슬픈 눈동자를 태우는데
이 밤이 새기 전에 땅을 울리며 오라
어서 어머니의 긴 이야기를 듣자
<1976년>
하늘아래 첫동네 강원도 인제군 진동리 오미자재배하는 귀농농가를 찾아서
이시영(59) 시인을 떠올리면 그가 늘 쓰고 다녔던 검고 둥글고 큰 뿔테 안경과
그 너머의 빛나는 안광(眼光)이 생각난다. 깡마른 체구와 또각또각 한마디씩 끊어가며 내놓는 정직한 말이 생각난다. 그는 1974년 문인들의 민주화운동 조직이었던 자유실천문인협의회 결성에 참여한 이후 엄혹의 시대와 맞서는 문인의 길을 걸었다.
이로 인해 연행되고 구금되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1989년 《창작과비평》 주간으로 있을 때 황석영의 북한 방문기 〈사람이 살고 있었네〉를 잡지에 게재했다는 이유로 구속되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유신 철폐를 위해, 구속 문인과 양심수 석방을 위해, 창작과 표현의 자유를 위해, 노동자의 살 권리를 위해 국가 폭력에 맞서고 분연히 일어나 싸웠다. 그런 체험과 시대에 대한 울분을 선혈(鮮血)의 언어로 기동력 있게 쓴 것이 그의 민중시였다.
첫시집 《만월》에 수록되어 있는 이 시에도 그의 발자취와 육성이 살아있다.
이 시는 어둠의 시대를 살다 실종되고 도피중인 동지가 돌아오기를 갈망하고 있다. 압수되고, 두들겨 맞고, 체포당한 자유와 민주주의와 인권과 평등과 평화가 어서 빨리 돌아오기를 열망하고 있다. 댓잎이 살랑이는 소리까지 들을 수 있는 숨막히는 고요가 기다림의 절절함이라면, 천지를 쿵쿵 울리는 역동적인 발자국 소리는 돌아옴의 당위에 해당한다. 저 폭압의 시대에는 자식의 생사도 모르는 채 하염없이 뜬눈으로 눈물로 밤을 지새운 어머니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이시영 시인은 민중시를, 이야기시를, 우리말을 세공(細工)한 단시(短詩)를 선보여 왔다. 근년에는 질곡의 한국 현대사를 스크럼을 짜고 함께 통과해온 인물들을 전면에 등장시키는 시를 써내고 있다.
광주일고 1학년 생활기록부에 장래 희망을 법관으로 적어 놓은 해방전사 김남주, 휘파람 잘 부는 송영, 마포추탕집에서 쭈글쭈글한 냄비에 된장을 듬뿍 넣고 끓여 함께 먹던 조태일, 문단 제일의 재담가 황석영, 상갓집에 가면 제일 나중까지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있던 인심 좋은 이문구, 섬진강서 갓 올라와 창작과비평사 문을 벌컥 열고 사과궤짝을 쿵 하고 바닥에 내려놓던 김용택 등등.
그는 지나간 옛일들을, 고통의 역사를 애틋하게 따듯하게 불러낸다. 특히 송기원과의 두터운 교분을 자랑하는 시편들은 왁자하고 눈물겹다. (이시영 시인은 송기원, 이진행과 함께 '서라벌예대 문창과 68학번 삼총사'로 불리기도 했다.)
이시영 시인은 "마치 이 세상에 잘못 놀러 나온 사람처럼 부재(不在)로서
자신의 고독과 대면하며 살아온 사람"(〈시인〉)이 바로 시인이라고 말한다.
그의 시는 '세상에서 가장 부드러운 미풍'이 되어 서러운 사람에게로 불어간다.
가슴이 뭉클하다.
(글. 문태준시인 / 시인100명이 뽑은 애송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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