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我/농업기사철

주말엔 ‘심, 마, 약 봤다’

주말엔 ‘심, 마, 약 봤다’

조선일보  입력 : 2012.11.15 

 

주중엔 첨단제품, 주말엔 ‘심 봤다’OLED 사업부에서 예산 업무 담당, 후배 권유로 전국 산 발품 팔기 시작, 허탕 끝에 속리산서 산삼 첫 발견, 작년엔 봉화에서 25년 된 산삼 캐자생조건 공부하는 게 運보다 중요, 산삼 못 캐도 山은 늘 푸짐한 밥상

"여기가 집이야, 경동시장이야?"

오랜만에 우리 집을 찾은 친구가 현관에 들어서며 한마디 던집니다. 그 말에 집안을 둘러보니 산삼·백선·더덕으로 담근 약술부터 올해 처음으로 도전한 산야초와 정성스레 다듬고 말린 약초(藥草)까지 정말 서울 경동시장 약재상이 따로 없습니다. 아내는 살림이 자꾸만 늘어난다고 타박하지만 그래도 지난 3년간 이 산 저 산 누비고 다닌 '초보 심마니'의 전리품(?)을 아무렇게나 둘 수는 없습니다.

저는 현재 삼성디스플레이 OLED 사업부에서 예산업무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OLED는 삼성 갤럭시S3 같은 스마트폰을 만드는 데 쓰이는 전자화면의 한 종류입니다. 첨단 제품의 핵심 부품을 담당하다 보니 회사생활은 언제나 바쁘게 돌아갑니다. 월요일 아침 주간회의와 함께 시작된 일주일이 눈 깜짝할 새 지나가고 정신을 차려보면 어느새 토요일입니다. 남들은 늦잠을 자거나 가족과 함께 여유로운 주말을 즐길 때, 저는 산삼을 찾아 이 산 저 산을 누비는 심마니로 변신합니다.

어린 시절 강원도 홍천 가리산 자락에서 자란 저는 어른이 돼서도 틈만 나면 산에 올랐습니다. 하지만 3년 전 고향 후배가 산삼(山蔘) 얘기를 꺼내기 전까지만 해도 등산은 건강을 위한 취미생활이었을 뿐 다른 목적은 없었습니다. 어쩌다 등산길에 약초나 버섯 등을 봐도 '어릴 때는 저런 걸로 웬만한 병은 다 고쳤는데' 하는 생각을 하고 지나칠 뿐 별 관심을 갖지 않았습니다.

 

유재원씨가 산삼 캐러 산행을 할 때 자주 착용하는 옷차림. 모기와 가시에 시달리고 뱀 등

야생동물을 만나는 경우도 많아 미군 군복 차림에 특수 천으로 만든 다리 보호대를 착용한다.

/ 유재원씨 제공

그런데 어느 날 이미 여러 번 산삼을 캔 적이 있는 한 후배가 저에게 약초 산행을 권했습니다. 처음에는 반신반의하는 마음에 썩 내키지 않았습니다. 이따금 뉴스에서 산삼을 캔 사람들의 이야기는 들어봤지만, '그런 일이 나에게도 일어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 때문이었지요. 하지만 후배의 경험담을 듣고 나니 순전히 운으로만 산삼을 캐는 건 아니고, 직업으로 하는 사람보다는 못하지만 초보자도 불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모든 산에서 다 나는 것도 아니고, 일반인이 캐는 산삼은 대부분 비싸게 팔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배웠지만, '나도 산삼을 캘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산삼에 대해 공부 좀 하고 부지런히 발품을 팔면 나도 행운의 주인공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후배를 따라나섰습니다.

첫 산행은 보기 좋게 실패로 끝났습니다. 경북 영주 근처의 소백산 자락을 몇 시간 헤맸지만 빈손으로 돌아왔습니다. 하지만 두 번째로 떠난 속리산 약초 산행에서 아주 오래된 산삼은 아니지만 제 생애 처음으로 "심 봤다!"를 외칠 수 있었습니다. 물론 그 후에도 한동안 허탕치는 일이 반복됐습니다. 그렇게 한 1년쯤 지나니 약초 산행에 익숙해질 수 있게 됐습니다.

작년 5월 경북 봉화 인근의 속리산 자락 산행은 잊지 못하는 기억입니다. 산삼을 캐는 날은 대개 산에서 뱀을 보는데, 그날도 어김없이 산삼을 캐기 전 뱀 한 마리가 풀숲으로 사라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크게 뜬 눈을 더 크게 뜨고 주위를 천천히 살피며 걸어갔습니다. 그때 무성한 풀밭 속에 언뜻 산삼 같은 게 보였습니다. 누가 볼세라 가까이 다가가 살폈더니 산삼이 분명했습니다. 작은 뿌리 하나라도 다칠까 싶은 마음에 양손을 활짝 펴서 땅속 깊이 넣고, 흙을 살살 털어가며 조심스레 들어 올렸더니 족히 25년은 돼 보이는 산삼이었습니다. 3년 통틀어 7번 산삼을 캤지만 그날 산삼은 달라 보였습니다. 그 길로 산을 내려와 감정을 받았습니다. 20년이 넘는 산삼이라 시가가 80만원에 해당한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 값진 데 쓰고 싶어 몸이 아픈 지인에게 선물로 주었습니다.

 

아직도 많은 사람이 산삼은 하늘이 내리는 약초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산삼이 어떤 곳에서 잘 자라는지 자생조건을 꼼꼼히 따져보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산삼이 많이 발견되는 곳은 경북 풍기, 충남 금산, 전북 진안 등 대표적인 인삼 재배지역 인근의 산들입니다. 이곳에서 산삼이 많이 나오는 이유는 인삼 씨앗을 먹은 새의 배설물이 자연조건과 잘 맞아떨어져 산삼이 자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산삼은 보통 햇빛이 강하지 않은 동북방향, 그리고 숲에 씨앗이 쓸려 내려가지 않는 경사 15도 이내의 완만한 평지에서 많이 자랍니다. 이런 자생조건을 찾았다면 다음에는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은 산길을 따라 걸으며 주변을 꼼꼼하게 관찰해야 합니다.

여러 명이 함께 산행하다 보면 방금 내가 지나온 자리에서 뒤따라오던 사람이 갑자기 "심 봤다!"를 외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내가 집중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잠깐 딴생각을 하거나 옆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다 산삼을 눈앞에서 놓쳐버린 것입니다. 하지만 한 번 놓쳤다고 실망할 것은 없습니다. 산을 가까이하는 한 산삼을 만날 기회는 언제고 다시 찾아오기 마련이니까요.

산삼을 못 캐면 또 어떻습니까. 봄·여름이면 각종 산나물과 열매, 가을이면 영양 만점 버섯과 약초까지 사시사철 자연이 낳은 먹거리들로 가득한 산은 언제 가도 맛 좋고 푸짐한 고향 밥상입니다. 내년 봄에는 동료들과 함께 전북 진안에 있는 마이산을 올라볼까 합니다. 마이산이 주는 봄 선물을 품에 가득 안고 돌아오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