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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농업과문화

휘파건축 제갈촌

휘파건축 제갈촌

 

 

 

 

 

그것이 1,000 년 전쯤의 이야기다. 그 후 후손들이 팔괘촌으로 이사를 하고 선조인 제갈량의 가르침인 '어진 재상이 아니면 어진 의사가 되라'는 뜻을 받들어 한약재업에 충실하여 축재를 하게 되었다. 27대손 제갈대사는 그가 익힌 풍수학에 의거해 지금의 팔괘촌 형태로 마을을 설계했다고 한다. 제갈량의 구궁팔괘진과 그 모양이 일치한다고 하는데 그때로부터 지금까지 9궁 8괘의 배치에는 변함이 없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상하 700년간에 걸쳐 이루어진 왕조의 교체 때문에 생기는 폭력이나 수많은 전화(戰禍)를 모두 피해갔다고 하니 신기하기도 하다.

 

 

제갈촌을 찾아가는 길은 1700여년 전 삼국시대에 촉한의 승상으로 일생을 마쳤고, 그 이후 중국인 마음속의 최고 재상이 되어버린 제갈량에서 시작될 수밖에 없습니다. 제갈량이 죽고 1000년이 지난 송대 말기 제갈량 후손 일파가 이곳에 자리를 잡아 오늘날까지 700여년의 삶을 이어온 마을이기 때문입니다. 5000여명의 주민 가운데 2700여명이 제갈씨로서 제갈씨 집성촌 가운데 가장 크고 잘 알려진 마을입니다.

   
중앙에 태극 모양 종지
제갈량은 중국인의 마음속에는 지혜와 충성의 화신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어려서 일찍 부모를 여의었으나 총명하여 공부를 잘했고, 때를 기다렸다 세상에 나왔고, 보잘것없는 무장집단에 지나지 않던 유비를 도와 조조, 손권과 대등하게 만들었습니다. 게다가 나이 어린 후주 유선을 황제로 모셔 충성스럽게 보필하다가 전장에서 병사했고, 그의 아들과 손자 역시 밀물처럼 몰려드는 적군에 맞서 장렬히 전사함으로써 대를 이어 충성하는 명예로운 가문으로 추앙받았습니다.
   
그후 중국의 수많은 황제들은 신하들이 제갈량의 충성을 본받기를 바랐고, 많은 부모들은 제갈량의 총명함을 바랐으니 누구든 제갈량을 칭송했던 것이지요. 젊어서는 키도 큰 미남에 공부도 잘하고 겸손했으니 요즘말로 ‘엄친아’였고, 황제 다음의 승상으로서 존경받는 인물이 됐으니 ‘가장 출세한 샐러리맨’이었습니다. 스스로 일인자 자리를 넘볼 역량과 기회가 있었지만 이인자로 생을 마감함으로써 ‘주주들이 가장 좋아하는 충직한 CEO’이기도 했습니다. 
   
집성촌이 이루어지는 것이야 전통시대에는 자연스러운 현상이었고, 당연히 가장 큰 제갈씨 마을인 제갈촌에는 제갈량 사당 이상의 흔적이 구체적으로 남아있습니다. 촌락의 가로 구조와 풍수지리적 평면배치에서부터 이를 알 수 있습니다. 이 마을의 형태는 제갈량이 북벌 때 위나라의 사마의와 맞서며 썼다는 구궁팔괘진(九宮八卦陳)을 차용했다고 합니다. 마을 중앙에 종지(鐘池)를 두고 이 연못에서 여덟 갈래의 길이 수레바퀴의 살 모양으로 뻗어나가고, 마을 바깥으로 여덟 개의 작은 산이 둘러싸고 있는데, 전체 모양이 곧 팔괘진이라는 것이지요. 지금도 팔괘촌으로 부르기도 합니다. 
   
종지는 태극 모양인데, 태극의 반은 물이고 나머지 반은 뭍으로 된 독특한 형태입니다. 물과 뭍에 우물 하나씩이 있어 마치 물고기의 눈과 같습니다. 전체 형태는 물고기 두 마리가 주둥아리로 서로의 꼬리를 문 것 같은 어형태극(魚形太極) 또는 음양어형(陰陽魚形)이지요. 
   
   
내팔괘진 밖에 외팔괘진
마을의 여덟 갈래의 골목은 내팔괘진에 해당하는데, 진지 안으로 들어온 적을 유인하여 혼돈에 빠뜨린답니다. 실제 마을 골목을 걷다 보면 이어진 듯 끊어진 길도 있고, 통할 것 같은데 통하지 않는 곳도 있고, 집 사이의 골목길이 신묘하게 꺾이고 휘어진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도적떼가 침입해도 쉽게 빠져나가지 못하게 돼 있답니다. 도적떼가 수시로 출몰하던 시대에 향촌의 자연부락은 방어기능이 중요했는데, 복잡한 골목이 일부 그런 기능을 담당했다는 것이지요. 
   
마을 바깥의 산들은 외팔괘진을 이뤄 외부로부터 시선을 차단해줌으로써 마을을 감싸며 보호한답니다. 실제로 제갈촌 뒷산 너머로 330번 국도가 시원스레 통과하고 있지만 작은 산의 울창한 숲이 가리고 있기 때문에 국도의 버스 정류장에 내려서면 이런 곳에 과연 유명한 마을이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생기기도 합니다. 1930~1940년대 일본군이 침략했을 때에도 이 지역에 꽤 부유한 마을이 있다는 걸 알아차리지 못한 탓에 약탈을 면했다고 하더군요. 제갈량의 명성이 높은 데다 제갈량의 팔괘진을 차용하여 마을 자체가 팔괘진을 이루고 있다는 점 때문에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흥미롭게 찾아오곤 합니다. 
   
마을에 들어서면 제갈량 사당이 중심에 있습니다. 우리도 곳곳에서 사당을 만나기는 하지만, 사당은 조상에게 제사 지내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이 지역은 원래 고융(高隆)이라 불렀으나 명(明)대 후엽부터 성씨를 지명으로 사용하기 시작해 제갈촌으로 굳어져 왔습니다. 이것은 당시의 중앙집권체제에서 지역사회를 조직화하는 정책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자연부락 하나하나마다 행정력이 미치기 어렵기 때문에, 마을의 어른을 임명장 없는 촌장으로 활용하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각 부락의 주된 성씨의 존경받는 연장자 또는 종손을 실질적인 행정적 촌장으로 인정하는 것이지요. 
   
이들은 관청에서 하달하는 지시를 공지하고 교육시키거나 준수 여부를 감독하기도 하고, 병력이나 부역의 차출 등을 집행하기도 하고 감독하기도 합니다. 마을 안의 분쟁을 조정하거나 사건사고를 판결하기도 했지요. 이와 같이 자연부락의 연장자 또는 마을 어른을 행정관 역할로 활용하면서 주된 성씨의 선조를 모시는 종사(宗祠) 건립을 적극적으로 허용했던 것입니다. 결국 가문의 일을 규율하는 종법(宗法)이 실정법으로 군림하면서 선조를 모시는 사당은 혈연적 의미를 넘어서서 행정적·제도적으로 아주 중요한 대상이 됐습니다. 그래서 많은 자연부락에 사당이 만들어진 것이지요. 
   
 백색의 외벽과 화려한 조각장식 특징
   
▲ (좌)제갈량을 제사 지내는 승상사당. (중)마을 중앙에 있는 연못인 종지. (우)제갈촌 구조

제갈촌에서도 제갈량을 제사 지내는 승상사당(丞相祠堂)과, 제갈량 기념관에 해당하는 대공당(大公堂)이 가장 중요한 사당으로 마을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고, 그 외의 작은 사당도 많습니다. 승상사당은 400여년 전 명대에 지어진 것으로 음력 4월 14일 제갈량 생일과 음력 8월 28일 제갈량 기일에 이곳에서 제사를 지냅니다. 이때에는 전국 각지에서 제갈량의 후손뿐 아니라 제갈량을 좋아하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일대 장관을 이룬답니다.
   
제갈촌 안으로 들어서면 연못 가장자리에 흰 벽에 까만 기와를 얹은 집들이 시야에 들어옵니다. 휘파건축의 전형적인 살림집들이지요. 휘파건축의 살림집은 밖에서 보면 푸른빛이 도는 벽돌, 회색의 작은 기와가 촘촘하게 덮인 지붕, 집과 집을 분절시킨 듯한 백색의 높은 외벽이 인상적입니다. 내부의 목구조에는 뚱뚱하게 살찐 보와 두툼한 기둥에 조각장식이 화려하고, 2층의 규방은 작은 것이 특징입니다. 이를 청전회와마두장(靑塼灰瓦馬頭墻) 비량반주소규방(肥梁柱小閨房)이라고 합니다. 좁은 골목에서 하늘을 쳐다보면 흰 몸뚱이에 뽀글뽀글 파마를 한 검은 머리가 얹혀 있고, 머리에 여러 개의 비녀가 도도하게 꽂힌 것 같이 보이지요.
   
집안으로 들어서면 두툼한 대들보(梁)에 목공예가 화려하고, 마룻대에는 채색이 되어 있어 조량화동(彫梁畵棟)이라고 합니다. 대문 바로 안쪽으로는 좁은 천정(天井)이 하늘로 뚫려 있고, 천정 옆의 2층 구석에는 좁고 작은 규방(閨房·여성의 침실)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명청시대 200여채 보존   
제갈촌의 주택들은 명청시대에 지어진 것들이 많은데, 학술 보고서에 의하면 200여채가 지금까지 보존돼 있어 고색창연이란 말이 잘 어울립니다. 중국 민간 고건축에서 학술 가치가 상당히 높은 마을입니다. 중국에서 가장 유명한 건축과가 있는 칭화대학에서 이 마을에 대해 상세히 조사를 한 뒤 책자가 간행되었고 그 이후 세상에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제갈촌의 살림집은 고건축 분류에서 휘파건축에 속합니다. 사회·경제·문화적 풍토 역시 앞의 글에서 답사를 해봤던 휘주의 문화와 같습니다. 
   
이 지역은 구릉지대로서 인구에 비해 농지가 모자라 상업과 수공업이 발달할 수밖에 없었지요. 12세기 초반 송(宋)나라가 여진족의 금(金)나라에 밀려 장강(長江)을 넘어 항저우로 천도하자 “강을 건넌 사람들이 길 위에 넘쳐난다”고 할 만큼 강남지역에 인구가 급증했습니다. 란시만 해도 송나라 천도 이후 인구가 20% 가까이 증가했다는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당시로서는 기록적인 인구증가입니다. 이로 인해 란시에서도 농사에만 매달리지 못하고 객지로 나가 장사를 하거나 수공업에 종사하는 인구가 증가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곳은 무엇보다 교통이 편리했습니다. 안휘성의 휘주, 장시성의 도자기 생산지 징더전, 쑤저우와 항저우가 수로로 잘 연결되어 있었고, 베이징에서 푸젠성으로 가는 육로 역시 란시를 통과하는 등 교통의 요지였습니다. 이미 수공업적인 배경도 있었습니다. 명대 이전에도 술, 중국식 햄, 동광, 조선, 목각 등 수공업이 발달했는데, 명대 후기부터는 제갈촌에서 약재업(藥材業)이 전문적으로 발달하기 시작했습니다. 주로 저장성 동부지역에서 생산된 약재를 가져다가 가공하거나 약으로 제조하여 파는 것이었지요. 제갈량의 후손답게 제갈행군산(諸葛行軍散)이나 와룡단(龍丹)과 같이 선조의 명성을 얹기도 했습니다. 약재업은 계속 발달해서 청대에는 란시 인근에 300여개에 달하는 약재상이 있었다고 합니다. 서양의 의학이 한창 쏟아져 들어온 후인 1947년 통계에도 제갈촌 출신들이 외지에서 200여개의 약재상을 운영하고 있었답니다. 그래서 ‘휘주 사람은 돈(寶)을 알고 제갈촌 사람들은 풀(草)을 안다’고 했습니다.
   
   
   약재업 흥성한 부촌
선조가 하던 약재상이 후대에 이어지고, 동향인들이 좌우로 얽히면서 결속력이 단단한 상방(商邦)으로 발전했습니다. 18세기에는 타지에 같은 상호의 분점을 여는 연쇄점 형태까지 출현했답니다. 각지의 상인들도 란시와 제갈촌을 왕래하면서 란시 성내에 회관을 내기도 했습니다. 제갈촌에 들어와 거주하는 외지인들도 생겼습니다.
   
란시에서 가장 약재업이 흥성했던 제갈촌은 부유한 마을이었습니다. 이들은 외지에 나가 돈을 벌었지만 엄격한 종법 규율에 따라 장사를 나가도 남자만 나갔습니다. 외지에 나간 남자들도 현지에서 결혼을 하거나 외지인 처자를 데리고 오지 않았습니다. 다만 돈을 가져와 고향을 부유하게 했습니다. 동시에 상업의 발달과 함께 외지인들이 들어오면서 인구 구성은 혈연부락에서 지연부락으로 넘어가게 됐습니다. 20세기 들어서면서 제갈촌은 제갈씨와 타성이 반반 정도가 되었다고 합니다.
   
부유했던 만큼 주택 안팎은 화려한 목공으로 장식돼 있습니다. 또 집이 곧 금고인 터라 주택의 방호 기능도 뛰어납니다. 문짝은 두꺼운 나무판으로 만들었고, 겉면에 철판을 대고 못을 박아 고정시키기도 했습니다. 상업의 발전과 외지인의 증가, 도적떼의 출몰 등이 결합되어 나타난 구조물이지요. 앞서 살펴본 상하이 이농주택의 튼튼한 석고문이 바로 휘파건축의 대문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제갈촌은 란시시 중심에서 서쪽으로 18㎞ 정도 거리에 있습니다. 란시는 저장성의 진화시(金華市)에 속하는데, 진화시에는 우리가 잘 아는 이우(義烏)가 속해 있습니다. 고속도로와 철도가 상하이~항저우~이우~진화로 이어지고, 진화에서 란시는 시외버스로 1시간 거리, 다시 제갈촌까지는 시골버스로 40분 거리라서 어렵지 않게 찾아갈 수 있습니다. 삼국지와 휘파건축과 중국의 향촌을 한꺼번에 돌아볼 수 있는 마을입니다.
   
윤태옥
   
   1960년생. 성균관대 사회학과 졸업. 방송위원회 비서실장, m.net 편성국장, 팍스넷 부사장, 팍스인슈 대표 역임. 현 중국 인문 다큐멘터리 전문제작사 와이더스케이프 대표. 다큐멘터리 ‘인문기행 중국’ ‘삼국지 기행’ ‘북방 대기행’ ‘동티벳 다큐’ 기획, 제작. 주간조선에 ‘중국 음식기행’ 연재. 중국 여행기인 ‘왕초일기’ 블로그에 연재. 2006년 이후 총 70여회 중국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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