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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농업과문화

중국의 정신 루쉰

중국의 정신 루

 

 

 

 

 

 

  1881년 9월 25일(음력 8월 3일) 절강성 소홍부 성내 동창방구에서 선비 집안 대가족의 맏아들로 태어남. 성씨는 쪼우, 이름은 수련, 자는 위차인, 어릴 때 이름은 짱소우이다. 뒷날 자를 위산으로 고침.
  1885년 1월, 둘째 동생 쪼쭤런이 태어남.
  1887년 가숙에 들어가 작은할아버지 옥전에게 감략을 배움.
  1892년 2월, 삼미서옥에 들어가 소우칭우 선생에게서 배움. 이 무렵 "맹자"를 읽음.
  1893년 2월, 중조모 사망. 3월, 조부 찌에푸가 북경에서 돌아왔으나 가을에 투옥됐고, 부친 삐이는 중병에 걸려 집안이 갑자기 몰락하기 시작. 루쉰은 전당포와 약방 출입이 잦아짐.
  1896년 부친 36세로 사망. 이 무렵부터 1902년 경까지 일기를 씀.
  1898년 5월, 남경으로 건너가 기관과 장학생으로 강남수사학당에 들어감. 12  월, 집안 사람들의 권유로 단 한 번 향리에서 현시에 응시함. 같은 달 넷째 동생이 급성 폐렴으로 사망. "알검생잡기", "시화잡지" 등을 씀.
  1899년 이때부터 옌푸가 번역한 "진화론"과 량치차오 주간의 잡지와 소설 등을 즐겨 읽음. 다시의 계몽적 신학의 영향을 받음.
  1900년 "별제제", "연봉인" 등의 구체시를 씀.
  1901년 구체시 "제서신문"을 씀.
  1902년 3월, 강남 독련공소에서 파견되어 일본으로 유학. 4월, 도쿄 우시고메의 고오분 학원 속성과에 입학. 여가를 틈타 철학 및 문학 서적을 읽으며 '인간성 및 국민성의 문제'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함.
  1903년 여름 휴가로 일시 귀국. 가을에 베른의 첫 번역 과학 환상소설 "달세계 여행"을 번역하여 12월에 간행. 동향 유학생 잡지 "절강조" 창간호에 "스파르타의 혼", "라듐 론"을 발표. 변발을 자름.
  1904년 4월, 고오분 학원 속성과 졸업. 6월, 조부 사망. 9월, 센다이 의학전문 학교에 입학.
  1906년 환등 사건으로 자퇴계를 재출하고 7월에 귀국하여 어머니의 명으로 쭈 안과 결혼. 며칠 뒤, 동생 작인과 함께 다시 일본으로 건너감. 의학공부를 그만두고 문학 연구에 전념함.
  1907년 동생 작인, 친구 쉬소우상 등과 문예지 "신생" 발행을 꾀했으나 무산 됨. "문화편지론", "마라시역설" 등을 써 유학생지 "하남"에 기고함. 가을에 쉬소우상 등과 간다 거리의 콩테 부인 밑에서 러시아어를 배움. 이 무렵 주로 독일어로 바이런 및 러시아, 헝가리, 폴란드 등의 애국시에 몰두하고, 특히 입센의 작품을 애독함.
  1908년 쉬소우상, 쪼우런, 쭈시쭈, 첸쉔퉁 등과 민보사에 다니며 짱삥린에게서 "설문"을 배움. 독일어협회에 적을 두고 쉬소우상 등과 독일어를 배움. 쪼우런과 공동으로 "역외 소설집"에 실린 여러 작품을 번역함.
  1909년 3월에 "역외 소설집" 제1권, 7월에 제 2권 간행. 6월에 귀국. 절강의 양급(고급과 초급) 사범학교의 생리학 및 화학 선생이 됨.
 1910년 조모 짱씨가 68세로 사망. 여름, 신임 교감에게 불만을 품고 사직한 뒤 귀향. 9월, 소흥 중학당의 생리학 겸 교감이 되고, 식물학 등도 연구  함.
  1911년 여름, 소흥 중학당을 사직. "월탁일보" 발기인의 한 삶으로서 동지에 하이네의 역시 등을 발표함. 12월, 처녀작 "회구"를 씀.
  1912년 1월, 남경에 수립된 임시정부의 교육총장이 된 차이웬페이의 초청으로 교육부 부원이 됨. 여가에 "사승 후한서"를 편찬, 이외에도 "당송 전기"를 초록하기 시작함. "고소설구침"을 완성함.
  1913년 2월, 교육부 독음통일회 회원으로 추대됨. 10월, 틈틈이 "혜강집"을 교정.
  1914년 불경 연구 시작.
  1915년 이 즈음부터 문학에 대해 특히 엄했던 옌스카이의 감시를 피할 목적으로 불경, 금석탁본 등의 수집, 연구에 침잠함.


  1918년 4월, 첸쉔퉁의 권유로 첫 백화소설 "광인일기"를 써 5월에 루쉰이란 필명으로 "신청년" 4권 5호에 게재함.


  1919년 1월, 애정에 관한 의견을 "수상록 40"이란 제목으로 "신청년"에 발표. 4월, "공을기"를 "신청년"에 발표. 이어 "약"을 "신청년" 5월호에 발표. 8월, 고우재 매입. 11월, "우리들은 오늘날 어떻게 아버지가 되는가"를 "신청년"에 발표. 12월에 귀향함.
  1920년 연말 무렵부터 북경대학 및 북경 고등사범대학 강사를 겸임. 중국 소설사를 강의함. "명천"을 북경대학 학생들이 "신청년"을 본따서 발행한 잡지인 "신조" 제2권 제1호에 발표. 


  1921년 1월, "고향"을 씀. 10월, "근대 체코문학 개관", "소러시아 문학 약설" 및 핀란드와 불가리아의 작품을 번역함. 12월, "아Q정전"을 파인이란 이름으로 "신보부간"에 연재하기 시작함. 


  1922년 5월, "노동자 세빌리오프", "현대 소설 역총" 간행. 7월, "어느 청년의 꿈", "에로센코동화집" 간행. 9월, "소설월보" 제13권 제9호에 "단오절" 발표. 10월, "집오리의 희극", "사희" 등을 씀. 11월, "보천"을 씀.
  1923년 7월, 동생 쪼런과 불화가 일어남. 8월, 북경의 "신조사"에서 첫 단편소설집 "눌함"이 출판됨. 가을부터 북경대학, 사범대학, 북경여자고등사 범학교, 세계어전문학교의 강사를 겸임.
  1924년 3월에 "축복", "행복한 가정" 등을 발표. 5월, "술집에서" 발표. 6월, "중국소설사략" 하권 간행. 오랜 기간 동안 교정을 보아 오던 "혜강집"을 완성함.
  1925년 2월, "청년 필독서"를 "경보부간"에 실어 논쟁의 발단을 일으킴. 3월, "민국일보"에 "장명등" 발표. 4월, "무원" 발간 및 "국민신문부간" 편집함. 5월, "한가한 이야기가 아니다"란 글를 써서 현대평론파와 논전을 개시함. 10월, "고독한 삶", "상서" 등을 씀. 11월, "어사"에 "이혼"을 발표. 같은 달 잡감 제1집 "열풍"이 간행됨.
  1926년 "조화석습"의 각 편을 "구사중제"란 제목으로 "무원"에 게재함. 2월,  "형제"를 "분원" 제3기에 발표함. 3.18 사건이 일어나 쉬소우상 등과 외국인 병원을 전전하며 피신하였다가 6월에 돌아온 뒤 중국대학 강사직을 사임함. 6월, "화개집"을 간행함. 7월, "작은 요하네" 번역. 8월, "소설 구문초"를 간행함. 두 번째 단편 소설집인 "방황"을 북신서국에 서 출판함. 8월 말, 북경을 빠져나와 하문으로 건너감. 이곳에서 린위 탕의 도움으로 9월부터 하문대학 문과 국학계 교수가 됨(중국문학사와 중국소설사를 강의).
  1927년 1월에 광주로 건너가 2월엔 중산대학 문학게겸 교무주임이 되어 쉬소우 상을 초치함. 1월에 "화개집 속편"을 모아 5월에 간행함. 2월, 홍콩으로 건너가 기독 청년회(YMCA)에서 "소리 없는 중국" 및 "고가 읽기는 끝나다"(쉬꽝핑 통역) 등에 대해 강연함. 3월, 잡문집 "분"을 간행함. 4월에 "야초" 편성, 7월에 간행함. 5월, "조화석" 편찬에 착수. 10월, 상해 경운리에서 쉬꽝핑과 동거 시작, 이후 죽을 때까지 상해에 정주함. 상해의 각 대학 초청에 응해 강연을 함. 12월, "당송 전기집" 상권 간행함. "어사"가 발금됐으나 이듬해부터 상해에서 복간됨.
  1928년 2월, "당송 전기집" 하권 간행함. 6월, 위따푸, 린위탕 및 미명사 동인들과 "분류" 창간하여 1929년까지 편집을 맡음. 9월, "조화석습" 간행. 11월, "이이집" 간행. 12월, 주간지 "조화"편집함.
  1929년 4월에 "현대 신홍문학의 제문제", "근대 세계단편소설집 1" 등을 번역 간행함. 9월에 아들 하이잉이 태어남. "근대 세계단편소설집 2"를 선정 편집, 그 서문을 씀.
  1930년 1월, 펑쉐펑, 위따푸와의 공편으로 원간지 "맹아" 창간(5호로 발금). 조화사가 경영 부진으로 문을 닫음. 2월, "문예의 대중화"를 씀. 6월, "문예정책" 간행. 7월, 프레하노프의 "예술론"을 출간함.
  1931년 4월, 펑쉐펑과 함께 "전초"를 발간함.
  1932년 1월, 상해 사변의 발발로 가족과 함께 내산서점으로 피난함. 2월, 1927__1929년까지의 단편을 모은 "삼한집" 및 1930__1931년까지의 잡문을 모은 "이심집"을 편하여 각각 서문을 씀. 전자는 9월, 후자는 10월에  간행함.
  1933년 1월, "수금" 간행. 1월부터 익명으로 "신보"의 자유담 난에 계속 단평을 발표함. 2월, "망각을 위한 기념"을 씀. 같은 달에 쑹칭링 댁에서 채원배, 린위탕 등과 함께 중국을 방문한 버나드 쇼를 만남. 3월, "상해에 온 버나드 쇼"를 편집, 간행함. 같은 달에 "하루의 일", "루쉰 자선집" 간행. 4월, "양지서"를 간행함. 6월, 독일 영사관에 가서 파시스트의 폭행에 대한 항의문을 제출함. 7월, 월간지 "문학"을 발간하고 동인이 됨.
  1934년 1월, "북평 전보"를 간행함. 2월, 잡문집 "남강 북조집"을 편성, 3월에 간행함. 9월, 고리키의 "러시아의 동화" 번역에 착수하여 이듬해 8월에 간행함. 10월, 청년미술가의 창작 목판화집 "목각기정"을 간행함. 잡감집 "준풍월담" 출간.
  1935년 1월, "중국 신문학 대계 소설 2집"의 편집에 착수하여 6월과 7월에 간행함. 잡문 및 시를 모은 "집외집"과 중국어문 개혁에 관한 논문집 "문외문담"을 출간함.
  1936년 1월, 어깨와 가슴에 통증이 매우 심함. 같은 달에 "화변문학"을 편성, 6월에 간행함. "고사신편" 간행. 2월 2일 돌연 천식을 일으킴. 4월, "러시아판 판화집"을 편하여 7월에 간행함. "심야에 쓰다" 및 "행상술림"의 서문을 씀. 5월, 병이 재발하여 위병진단을 받음. 8월, 늑막의  물을 빼고 토혈함. 일본 전지 요양을 꾀했으나 중지함. 9월, "죽음" 및 "여조" 등을 씀. "해상술림" 간행. 10월 19일 폐결핵으로 새벽에 지병이 재발, 이튿날 오전 5시 25분에 사망함.
  1937년 유저인 "야기", "루쉰 서간", "차개정잡문", "동이집", "동말편" 등이 출간됨.
  1938년 "루쉰 전집" 20권 출간.
  1941년 "루쉰 30년집" 출간.
  1956__1958년 중국에서 상세한 주석을 덧붙인 "루쉰전집" 10권이 출간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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