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로 떠난 치즈 신부님
한국일보 사진
지정환, 전쟁의 상흔이 채 가시지 않았던 때에 한국에 오신 성직자로 가난한 농촌의 삶을 위해 애쓰신 분이다. 장애로 고통받는 자들의 손을 잡고 사회로 나서게 하며 낮은 곳 필요한 곳에서 늘 함께하신 삶을 살아오신 분. 노자의 공수신퇴(功遂身退)-공을 이루었으면 물러난다는 지신부님이 이제 천국에서 평안함을 다하시리라.
전주천변 치명자산 자락에 있는 묘소에 들러 삶의 지혜를 얻고 싶다.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과 함께하고 그들의 나아지는 삶을 위해 행동하고 실천하며 보여주신 크나큰 사랑을 기억하리라. 지정환 신부님의 최종 선물(목표)은 치즈가 아니었다. 한국 치즈의 아버지’ ‘임실 치즈의 대부’로 불리는 벨기에 출신 지정환(본명 세스테벤스 디디에)은 당시 임실 사람들은 가난하고 무지했다. 배고픔을 해결하는 게 성직자로서 말을 전하는 것보다 간절했다.
지 신부가 처음 농민들과 함께 뛰어든 사업은 갯벌 간척이었다. 1961년 전북 부안성당에 부임한 뒤 지역 농민들과 함께 99만㎡ 바다를 농지로 만들었다. 간척된 땅은 농민 100명에게 돌아갔다. 당시 한국 음식에 적응하지 못해 빵과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다 담낭에 문제가 생겨 제거 수술을 받았다. 1964년 수술을 위해 벨기에로 돌아갔다 6개월 뒤 한국으로 돌아와 전북 임실성당으로 자리를 옮겼다.
임실군에 부임한 지 신부는 지인으로부터 산양 두 마리를 선물받아 키우다 치즈 생산에 나서게 됐다. 팔고 남은 산양유를 치즈로 만들면 농민을 위한 고소득 사업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1967년 국내 최초의 치즈 공장을 만들었다. 부모가 준 2000달러가 종자돈이었다. 그러나 치즈 생산은 2년 가까이 성과가 없었다. 지 신부는 직접 유럽의 치즈 공장을 찾아가 방법을 배우고 귀국했다. 마침내 1969년 한국에서 최초로 치즈 생산에 성공했다. 이후 임실 치즈가 점점 유명해지자 지 신부는 치즈 공장을 주민이 운영하는 협동조합에 아무 대가 없이 넘겼다.
1980년대부터는 장애인 공동체 '무지개 가족'의 지도 신부로 중증 장애인 재활 사업에도 헌신했다. 한국 치즈 산업과 사회복지에 이바지한 공로로 2016년 법무부로부터 우리나라 국적을 받았다.
'임실 치즈'의 아버지 지정환 신부. 그의 이름 지정환은 '정의가 환히 빛나게 하려고 지랄한다'는 뜻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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