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農/인삼이야기

인삼의 세계사

서양의 열등감이 지운 인삼의 세계사

입력 : 2020-02-26 세계일보

 

 

 

 

“인삼 뿌리가 그렇게 큰 칭송을 받을 만큼 효능이 좋은가?”

 

인삼의 가치를 묻는 이런 질문은 특별할 게 없어 보이지만 그 주체가 17·18세기 유럽의 일급 지식인 고트프리트 라이프니츠(1646∼1716)라는 걸 감안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는 독일 계몽주의 철학의 여명을 연 철학자이자 각국의 왕에게 조언한 행정가, 역사가였다. 라이프니츠의 질문은 서양이 수백 년 전 이미 인삼에 대해 깊은 관심을 드러냈고, ‘신비의 명약’으로까지 인식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다. 

 

근간 ‘인삼의 세계사’(설혜심, 휴머니스트)는 의학 논문, 보고서, 지리지, 식물학 서적, 신문 등 서양의 문헌을 뒤져 서양사에 남아 있는 인삼의 흔적을 추적한다. 책에 따르면 19세기까지만 해도 서양에서 인삼은 지금보다 훨씬 쉽게 접할 수 있는 주제였다. 그런데  ‘오리엔탈리즘’(동양에 대한 서양의 왜곡과 편견)이 작동하면서 서양의 역사에서 인삼이 은폐되었다는 설명은 특히 흥미롭다.    

 

◆“기력 회복에 독보적인 약”, 서양의 적극적 관심  

 

인삼에 대한 서양의 전반적인 인식을 그리는 게 쉽지는 않으나 지식인들의 태도에서 그것의 일단을 엿볼 수는 있다. 서양의 과학혁명을 이끈 집단으로 꼽히는 영국의 왕립학회는 1665년 기관지 ‘철학회보’의 창간호에 인삼을 다룬 논문을 실었다. 영국을 대표하는 과학자들이 큰 관심을 보였다는 증거다. 논문은 “1파운드당 은 3파운드나 할 정도로 귀한 이 약재는 원기 회복제이자 강장제로 (중국에서) ‘만병통치약’으로 불린다는 사실”을 소개했다. 1681년 간행한 주요 수집품 카탈로그에도 인삼 뿌리를 실었다. 

왕립학회에 필적할 만한 위상을 가진 프랑스의 왕립과학원은 1686년 9월 시암(지음의 타이)의 사절단이 루이 14세에게 인삼을 진상한 것을 계기로 인삼 연구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루이 14세가 이 인삼을 복용했는지는 확인할 수 없으나 그의 건강을 책임진 궁중의 의사들이 관심을 가졌던 것은 분명하다. 왕립과학원은 수십 년 동안 진상된 인삼을 귀중한 수집품으로 보관했다.

 

이런 분위기가 이어져 1736년 2월 파리의과대학에서 인삼을 주제로 한 서양 최초의 박사 학위 논문이 나왔다. 논문 저자인 폴리오 드 생바스는 “인삼이 설사, 이질, 기력 약화, 위와 창자의 통증, 실신 등을 치료하는 데 유용하며, 쇠약해진 기력을 회복하는 데도 독보적인 효능을 지닌 약”이라고 주장했다. 실제 스웨덴의 식물학자인 피터 캄은 18세기 중반 캐나다에서 인삼이 천식 치료, 건위제(위의 기능을 촉진하는 약제), 임신 촉진제로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고했다. 

 

1716년 북아메리카의 ‘화기삼’ 발견 이후 인삼이 대륙이동설의 증거로 널리 활용됐다는 사실도 재밌다. 예수회 신부 조제프 프랑수아 라피토는 이 해 캐나다에서 원주민 여성을 통해 발견한 인삼이 만주의 ‘타타르인삼’과 같은 것이라고 확신했고, “인삼으로 인해 아메리카 대륙은 원래 아시와와 연결되어 있었음이 증명되었다”고 주장했다. 책은 라피토의 이런 주장을 “여러 사람이 열광적으로 받아들이고 인용했다”고 소개했다.              

 

◆열등감, 서양사에서 인삼이 사라진 이유  

 

 

“(인삼을 파는 중국인들이) 너무 뛰어난 사기꾼이어서 납 조각을 안에 넣어 무게를 늘린다.”

 

18세기 존 힐이라는 사람이 쓴 ‘약물학사’에 나오는 내용 중 일부다. 책은 “유럽의 많은 약학서는 인삼을 둘러싼 중국인들의 사기술을 지나치리만큼 세세하게 묘사하곤 했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인삼에는 “상도덕을 지키지 않는 ‘먼 나라에 사는’ 사기꾼 중국인의 이미지가 어른거리게” 되었다. 서양의 이런 접근은 “인삼의 자생지가 유럽과는 다르다는 점을 부각하며 거리 두기를 하고 배척해 간 것”이며 인삼에는 다양한 방식으로 부정적 이미지가 투영됐다. “오늘날 서구 의학사에서 인삼을 찾아보기란 쉽지 않은” 현실은 이처럼 서양이 “의학의 영역뿐만 아니라 문화적으로도 인삼을 경원시하며” 거리 두기를 했기 때문이다.

  

서양에서는 중국 황제가 인삼 채취를 위해 수많은 인원을 혹사시키는 장면을 반복적으로 언급됐다. “1709년 황제는 만주족 1만 명에게 인삼을 채취해 오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 불쌍한 사람들은 이 탐색으로 너무 지쳐 있다”는 등의 서술이다. 서양이 그려낸 이런 광경은 “많은 사람의 희생을 통해 얻어지는 인삼이기에 그것은 오직 권력을 지닌 자들만이 향유할 수 있는 계급성을 함축한 무엇”이 된다. 또 인삼에 대한 믿음이 서양 의학을 거부하고 과거의 관행에 집착하는 동양의 아집과 독선으로 간주됐다. 인삼이 최고의 명약으로 대접받는 이유를 다른 의약품이 발달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나름의 ‘합리적인’(?) 설명이 제시되기도 했다. 

 

책은 “서양은 인삼에 사치, 방탕, 전제성, 비합리성 등의 부정적 요소를 덧칠해갔다”며 “인삼의 생산과 수출에 깊이 관여하고 있었음에도 서양이 인삼을 타자화하게 된 배경에는 인삼 가공 기술에서 동아시아에서 결코 범접할 수 없다는 열등감과 내수화는 요원했던 경제적 이해관계가 깔렸다”고 분석했다.   

 

강구열 기자 river910@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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