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누구인가
저자:엄정식
출판사:철학과 현실사
출판년월일:1993. 11. 15.
젊은 시절 나는 가슴속 깊숙한 곳에서 들려오는 음성의 주인공을 '다이몬'이라 이름짓고 그것을 애타게 찾으며 소크라테 스의 가르침 "너 자신을 알라!"가 무슨 뜻인지를 헤아려보려고 온갖 노력을 다 기울였다. 나는 그 시절의 고뇌와 절망과회한의 추억을 '다이몬과의 방황'이라고 부른다. 그것은 진정한 의미의 나 자신이누구인지를 알아보려는 내면적인 몸부림이었다. 그러한 방황을 황량한 미시간 벌판에서 어느 정도 마무리하고 귀국하였을 때 나는 내 후학들이 그 처절한 방황을 거듭하지 않도록 그리하여 그들이 내가 도달한 바로 그 지점에서 출발할 수 있도록 도울 것을 스스로 다짐하였다. 그후로 또 많은 세월이 흘렀다. 그러나 이 방황은 그 성격과 내용을 달리할 뿐 더욱 폭넓고 집요하게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셈이다. 틈만 나면 선뜻 여장을 꾸려 낯선 거리를 헤매는 버릇이 아직 남아 있는 연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지도 모른다.
나는 여행을 할 때면 무엇보다도 나 자신과의 새로운 만남을 즐긴다. 물론 나는 외국 여행을 할 때마다 생소한 풍습과 언어 그리고 낯선 사람들을 많이 만나고 또 사귄다. 그러나 그러한 만남이 이루어질 때마다 시시각각으로 새롭게 변하고 다시 태어나는 이국의 그 어느 낯선 사람들보다 더욱 낯설어지는 나 자신과의 만남이 몹시도 신기하고 소중한 경험이다. 그런 뜻으로 나의 여행은 나의 내부 깊은 곳을 구석구석 찾아다니는 정신적 방황의 일부이며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여전히 '다이몬과의 방황'일 따름이다. 그러나 이 방황에서 한가지 분명히 달라진 것이 있다면 그것은 '나'라는 개념이 점차 사회적 맥락으로 확산되고 또 실천적으로 변질되어 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지금 나를 사로잡고 있는 철학적 주제는 형이상학적 혹은 인식론적 차원에서 '나'의 존재를 규명할뿐만 아니라 사회적 및 윤리적 관점에서의 '나' 즉 '우리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이다.
나는 지난 몇 년간 수차례에 걸쳐 여행길에 나서는 동안 주로 '우리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몰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서 '우리'란 일차적으로는 이 땅에서 오늘을 살아가는 한국인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인이 아닌 나를 상상할 수 없듯이 나 자신이 빠져 있는 한국인 또한 무의미할 수 밖에 없으며 동시에 인류를 구성하고 있는 한 성원으로서의 한국인을 염두에 두어야 하기 때문에 그것은 매우 복합적인 관념의 형태를 띠기도 한다. '우리'란 지난 반세기 동안 분단된 조국의 남쪽에서 살아온 우리들 각자가 될 수도 있고 때로는 20세기의 후반을 살아가고 있는 현대인 모두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든지 간에 한가지 분명한 점은 그 어느 때보다도 바로 지금 우리가 과연 누구인지를 묻는 일이 더욱 절박하고 시급한 문제가 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물론 현실과 너무 떨어져 있으면 관념의 세계로 몰입하게 되어 숲은 보지만 나무들을 보지 못하는 폐단이 있다. 그러나 현실과 너무 밀착되어 있으면 무수한 나무들의 모습은 볼 수 있지만 그러한 것들이 얽히고 설켜있는 전체로서의 숲을 보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어느 정도'의 거리를 유지하는 것은 숲과 나무의 관계를 아울러 파악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조건이 될 지도 모른다. 이처럼 어느 마을을 지나가는 나그네와도 같이 혹은 수술대 앞에 선 의사처럼 냉혹할 정도 의 객관성과 공정성을 유지하며 현실을 바라볼 때 '우리'라는 개념도 좀더 분명하고 정확하게 분석될 수 있을 것이다. 도대체 우리는 누구인가?
첫째 우리는 모두 인간이란 점을 상기해 두지 않으면 안된다. 이것보다 더 확실한 사실은 없다. 우리는 분명히 인간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신도 아니고 짐승도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지적하는 바와같이 이성이라는 신적인 요소를 어느 정도 지니고 있는 것이 사실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과 비교할 때 짐승과 닮은점이 훨씬 더 많은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신이나 짐승은 아니다. 누가 감히 이것을 부정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런데 나는 왜 우리가 모두 인간이라는 이 평범한 사실을 애써 강조하고 있는 것일까. 우리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인간이어야 한다는 당위를 거듭 강조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둘째로 명심해 두어야할 것은 우리가 20세기 후반을 살아가고 있는 현대인이란 사실이다. 우리는 현대인이기 때문에 고대 아테네나 로마인과 다르며 신라나 고려 때 사람들과도 다르다. 우리는 그들과 달리 교통이나 통신 혹은 그밖의 여러가지 면에서 문명의 이기를 누리고 있지만 이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르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가공할 핵무기의 위협과 갖가지 공해가 삶의 터전인 자연을 급속도로 좀먹어 가는 실정이다.또한 기계기술의 눈부신 발달에 힘입어 컴퓨터를 비롯한 각종 오묘한 도구들을 활용하고 있으면서도 그 복잡한 원리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기계들의 성능과 효과에 대해서 수동적인 태도를 취할 수 밖에 없다. 그 도구들은 알라딘의 램프에서 나온 거인처럼 분명히 우리에게 필요한 존재이고 또 한낱 수단에 지나지 않는 것이지만 어쩐지 불안하고 위협적인 존재로 느껴지는 것도 부정할 도리가 없다. 더구나 현대인을 지배하는 불안과 소외 혹은 무규범 현상의 모든 근원을 우리는 여기서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과학은 과학주의 사고 방식을 낳고 이것은 세계를 하나의 거대한 유기체적 기계로 파악할 뿐 아니라 인간을 잡다한 부속품의 일부로 전락시키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관능적 쾌락의 추구에 몰입하고 다른 사람들을 수단으로 취급하는 풍조는 오히려 당연한 현상인지도 모른다. 여하튼 우리가 오늘날 어떤 종류의 인간으로 변모되고 있는지를 이해하는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자아의 인식에 매우 중요한 부분이 아닐 수 없다. 현대의 과학 기술 문명은 자아의 상실과 갖가지 비인간화 현상을 더욱 가중시키고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끝으로 특히 마음에 새겨 두어야 할 것은 우리가 모두 한국인이라는 사실이다. 한국인이란 무엇인가 여기에는 여러가지 뜻이 담겨 있겠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자기를 잉태하고 낳아서 길러 준 조국으로서의 한국을 받아들이고 사랑하며 또 운명을 함께한다는 점일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너무 조급해져 있거나 근시안적으로 사태를 바라보아서는 안 될 것이다. 조국에 대한 애정이 너무 지나치면 오히려 그 운명을 위태로운 지경에 까지 몰아갈 경우가 있으며 그렇게 되면 결국 무관심보다도 못한 결과를 낳을 수도 있을 것이다. 더구나 우리는 상반된 이념과 애증이 교차하는 착잡한 감정으로 대립된 채 두 동강이가 난 배의 반쪽에 몸을 싣고 표류를 계속 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 동강난 배가 어디를 향해 각기
흘러가고 있는지 아무도 단언할 수 없는 어려움이 있다. 그러나 함부로 항로를 정하고 돛을 높이 올릴 수도 없는 입장에 있다. 오늘날 우리들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수 없는 복잡한 세계 정세의 난맥상이 우리들의 의지를 무력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역"에 '관국지광'이란 표현이 있다. 관광의 어원이 되는 말이다. 그렇다면 관광의 참뜻은 어떤 나라의 빛을 보아 내는 데 있다. 그것은 그 나라에 사는 사람들이 지니는 '정신의 빛' 즉 문화를 체험하는 것이라고 해석해도 좋을 것이다. 나는 바로 그러한 빛을 보기 위하여 어디든지 갔다. 그 빛 속에는 우리의 참모습이 더욱 선명하게 비추어져있었고 그 한가운데서 더욱더 새로워지는 나 자신의 모습을 나는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결국 나 자신에로의 길고 긴 여로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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