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我/나의이야기

학익진(鶴翼陣)농법

학익진(鶴翼陣)농법

 

 

역사에 이름 한 줄 남기지 못했지만 힘차게 노를 저으며 배를 회전시키고 발포를 했던 병사들이 

학익진 승전을 이끌었듯 이 땅의 구석을 지키는 농부들이 있어 다시 일어설 것이다. 대한민국  참 농업은....

 

 

 

 

 

학익진은 기본적으로 그림에서 보듯이 적은 아군에게 종대가 되도록 하고, 아군은 횡대가 되도록 배치하는 형태에 적을 감싸 안듯 양 날개가 휘어진 배치가 된다. 이런 배치는 아군의 포격 유효 사거리 안에 적을 최대한 집어넣기 위한 것이다.

 

이순신은 함포전을 통한 일정한 거리의 유지로 그 효과를 극대화 하고 있다. 다시 이순신은 조선 수군이 보유한 판옥선을 적극 활용함으로써 더욱 큰 효과를 창출해 낸다. 즉 판옥선의 특징을 이용한 것인데, 이 배는 배의 바닥이 평평해 빠르게 달릴 수는 없으나, 홀수선(배가 물속에 잠기는 선)이 낮아 수심이 낮은 서해에서 유리하며, 특히 양측의 노를 반대로 젓는 것으로 제자리에서의 회전이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다.

 

제자리에의 회전은 판옥선을 쉽게 돌려 측면에 설치된 화포를 적에게 발포함으로써, 선수와 선미에 설치된 2문 내외의 화포에 비해 5배인 10여문의 화포를 빠르고, 또 일시에 발포할 수 있게 해 준다. 즉 학익진의 형태에서 종대로 내려오는 적은, 위의 예에서 4척이 각각 2문씩 총 8문의 화포를 발포할 수 있지만, 이순신의 판옥선은 학익진으로 4:10, 다시 화포에서 8:100의 비율이 되도록 만드는 것이다. 즉 화포전을 계속하는 한 100:10의 전세는 8:100으로 역전된 것이다.

 

 

다시 판옥선의 제자리 회전 기능을 적극 활용한다면, 좌현의 포를 발포할 때, 우현은 장전을 하고, 발포가 끝나면 배를 회전시킨다. 이 시간에 발포를 마친 좌현은 장전을 하고, 장전이 끝난 우현이 적에게 향하면 다시 발포한다. 다시 배는 회전하고 회전이 끝나면 장전이 마쳐진 좌현이 다시 발포할 수 있는 것이다. 이로서 앞서의 8:100은 다시 8:200의 비율로 역전이 된다. 바로 이것이 정(丁)자 타법으로 적선에 화포가 많은 측면을 향하게 하는 것이 핵심인 것이다. 위의 학익진도는 바로 학익진과 정자타법이 동시에 적용되는 형태인 것이다.

 

이순신의 학인진도를 보면 얼마나 정교한 진형인지 감탄하게 된다. 흐르는 물살과 바람의 영향을 받으면서 이런 형태의 진을 수십척의 함선이 유지하기란 매우 어렵다.  실전에서 이런 형태의 진형을 그것도 평지에서의 육군이 아닌 바다에서의 수군이 유지해 완벽하게 운영했다는 것은 이순신의 전략과 전술 뿐 아니라 장졸들의 희생이 없이는 불가능했다. 

 

 

역사에 이름 한 줄 남기지 못했지만 힘차게 노를 저으며 배를 회전시키고 발포를 했던 이름없던 병사들이 위대한 역사를 만든 것이다. 농업이라는 험난한 대지에서 이름없는 들플로 이 땅을 지키는 수 많은 농부들 속에서 위대한 학익진 농업이 태동하길 기대해 본다.

 

 

충무공 탄신일 단상

 

항상 우리 곁에서 호국정신을 일깨우는 충무공은 역사속의 위인이요 영원히 잊히지 않는 영웅이다. 충무공 탄신 기념일인 428일이 되면 충무공을 되새겨보는 행사가 이어진다. 나라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충무공이 떠오르는 것은 충무공이 이루어 놓은 업적 때문만이 아니다. 충무공의 업적이야 다시 말할 필요조차 없다. 세계 역사 속 어느 위인과 견주어도 절대 뒤지지 않은 업적인 것이다.   나라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친 충무공의 시련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혁혁한 전과를 올려 수군을 총지휘하는 자리에 오른 충무공은 모함에 빠진다. 사령관의 자리에서 죄인이 되어 서울로 끌려 올라갈 때 그 심정이 어떠했을까. 겨우 목숨을 건져 백의종군을 하는 사이 조선 수군은 전투에 패배하고 궤멸되다시피 한다.

 

다시 수군을 지휘하는 자리에 오르지만 남겨진 것은 고작 열두 척의 배.   모함으로 죄인의 몸이 되고 백의종군을 거친 충무공은 그래도 나라를 구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지난날의 고통은 묻어버리고 나라를 구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나선다. 전장에서 숨을 거둔 충무공의 마지막 순간 역시 자신의 안위보다는 나라가 우선이었다.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마라는 충무공의 말은 역사 속 그 어떤 말보다도 가슴을 울리는 말이 아닐수 없다. 충무공의 탄신 기념일에만 추모의 마음을 갖는 것은 나라와 민족에게 남겨준 충무공의 업적에 비해 보면 부족해도 한참 부족해 보인다.  

 

충무공이 우리에게 남긴 것은 나라를 구한 업적만이 아니다. 맡겨진 자리에서 해야 할 소임을 다하고 온몸으로 묵묵히 실천하는 자세를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높은 관직을 취하려 하지 않았고 기름진 음식을 탐하지 않았고 자신의 공적을 세상에 드러내지 않았다. 충무공은 아무것도 드러내지 않았지만 역사는 충무공의 위대함을 가감 없이 전하고 있다. 그렇기에 충무공은 역사 속의 영웅으로 남았다. 세상이 어두워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아도 세상은 모든 것을 정확하게 평가한다. 충무공의 그런 삶을 역사 속에서 배워야 한다. 옛것을 익히고 새것을 배우는 것은 사람이 지향해야 할 자세다. 옛 역사 속에서 배워야 한다는 것은 단순한 지식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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