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월을 시작하며...
농업인의 이야기 속에 “4월과 5월을 나에게 주면 나머지 열달은 모두 당신께 주리라”라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바람부는 사월, 죽은 땅에서 라일락 꽃을 피우는 사월은 자연과 함께하는 농업인뿐만 아니라 우리 인생에 있어서도 한 해의 열쇠라는 생각입니다. 4월을 여는 날, 잔인한 달로 시작되는 엘리엇의 장시를 떠올려 봅니다. 황무지란 생명이 서식할 수 없는 불모의 땅이지만, 이 시에서 황무지는 생명이 깃들 수 없는 문명을 뜻하겠지요.
제 인생이 그러했습니다. 매년 희망의 한 해를 꿈꾸지만 사월이 되면 버얼써 절망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돌이켜 보면 좀더 멀리 보고 준비해야 하거늘 눈 앞의 욕망과 욕심으로 안개속을 걸어 왔습니다. 희망의 봄이 다가 올수록 마음은 황무지를 향하고 있습니다. 불혹을 넘어서면서 맞닥뜨린 문명의 막다른 골목에서 삶에 서린 ‘무한한 농업’과 ‘절망을 넘는 소망’속에서 오히려 깊은 좌절을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를 더욱 절망하게 한 것은 그 절망조차도 의식하지 못했던 스스로의 내면 때문입니다.
무녀 시빌의 절망에는 아직 희망은 있었습니다. 그녀는 죽고 싶어 했지요. 왜냐하면 그 뒤에는 새로운 재생이 있기 때문입니다. 20세기 최대의 시인 엘리엇은 섬뜩한 이미지와 푸가풍의 반복적이고 다음성적인 리듬으로 끊임없이 이 물음을 답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의 절망에는 희망이 없습니다. 나는 공허한 정신을 가지고 죽음을 피해 다닐 뿐, 외로운 투구벌레와 같이 재생의 길을 걷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새싹을 키우고 새생명을 키우는 농부의 마음도 따라가지 못하는 부끄러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엘리엇(Thomas Sterns Eliot)의 황무지(The Waste Land)가 떠오릅니다. 그의 작품은 20세기 모더니즘에서 인생의 많은 부분을 생각하게 해줍니다. “4월은 가장 잔인한 달/라일락꽃을 죽은 땅에서 피우며,/추억과 욕망을 뒤섞고,/봄비로 활기 없는 뿌리를 일깨운다.”라고 노래했지요. 4월에 다시 희망을 노래하고 싶습니다. 우리 모두에게..........
황 무 지(荒蕪地) /T.S. Eliot
쿠메의 한 무녀(巫女)가 독 안에 매달려 있는 것을 내 눈으로 보았다. 그 때 아이들이 "무녀, 당신은 무엇이 소원이오?" 라고 묻자,
그녀는 "난 죽고 싶다."라고 대답했다. - 한층 훌륭한 예술가 에즈라 파운드에게
1부. 죽은 자의 매장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추억과 욕정을 뒤섞고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운다.
겨울은 오히려 따뜻했다.
잘 잊게 해주는 눈으로 대지를 덮고
마른 구근 (球根)으로 약간의 목숨을 대어주었다
슈타른 버거호 너머로 소나기와 함께 갑자기 여름이 왔지요.
우리는 주랑(柱廊)에 머물렀다가
햇빛이 나자 호프가르텐 공원에 가서
커피를 들며 한 시간 동안 얘기 했어요.
저는 러시아인이 아닙니다. 출생은 리투아니아지만
진짜 독일인입니다.
어려서 사톤 태공의 집에 머물렀을 때 설매를 태워줬는데 겁이 났어요.
그는 말했죠. 마리 마리 꼭 잡아.
그리곤 쏜살같이 내려갔지요.
산에 오면 자유로운 느낌이 드는 군요.
밤에는 대개 책을 읽고 겨울엔 남쪽에 갑니다.
이 움켜잡는 뿌리는 무엇이며,
이 자갈 더미에서 무슨 가지가 자라나오는가?
사람들이여, 너는 말하기 커녕 짐작도 못하리라
네가 아는 것은 파괴된 우상더미뿐
그곳엔 해가 쪼여대고
죽은 나무에는 쉼터도 없고
귀뚜라미도 위안을 주지 않고
메마른 돌엔 물소리도 없느니라.
단지 이 붉은 바위 아래 그늘이 있을 뿐
(이 붉은 바위 그늘로 들어오너라)
그러면 너에게 아침 네 뒤를 따른 그림자나
저녁에 너를 맞으러 일어서는 네 그림자와는 다른
그 무엇을 보여주리라
한 줌의 먼지 속에서 공포(恐怖)를 보여주리라
<바람은 상쾌하게
고향으로 불어요
아일랜드의 님아
어디서 날 기다려 주나?>
"일년전 당신이 저에게 처음으로 히야신스를 줬지요.
다들 저를 히야신스 아가씨라 불렀어요."
-- 하지만 히야신스 정원에서 밤늦게
한아름 꽃을 안고 머리칼 젖은
너와 함게 돌아왔을 때
나는 말도 못하고 눈도 안보여
산것도 죽은 것도 아니었다.
빛의 핵심인 정숙을 들여다 보며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황량하고 쓸쓸합니다, 바다는>
유명한 천리안 소소트리스 부인은
독감에 걸렸다. 하지만
영특한 카드를 한 벌 가지고
유럽에서 가장 슬기로운 여자로 알려져 있다.
이것 보세요. 그녀가 말했다.
여기 당신 패가 있어요. 익사한
페니키아 수부이군요.
(보세요, 그의 눈은 진주로 변했어요.)
이건 벨라돈나, 암석의 여인
수상한 여인이예요.
이건 지팡이 셋 짚은 사나이, 이건 바퀴
이건 눈 하나밖에 없는 상인
그리고 아무 것도 안 그린 이 패는
그가 짊어지고 가는 무엇인데
내가 보지 못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교살당한 사내의 패가 안보이는 군요!
물에 빠져 죽는 걸 조심하세요.
수많은 삶들이 원을 그리며 돌고 있군요.
또 오세요. 에퀴톤 부인을 만나시거든
천궁도를 직접 갖고 가겠다고 전해주세요.
요새는 조심해야죠.
현실감이 없는 도시,
겨울 새벽의 갈색 안개 밑으로
한 떼의 사람들이 런던교 위로 흘러갔다.
그처럼 많은 사람을 죽음이 마쳤다고
나는 생각도 못했다
이따금 짧은 한숨들을 내쉬며
각자 발치만 내려 보면서
언덕을 너머 킹 윌리엄가를 내려가
성 메어리 울로스 성당이 죽은 소리로
드디어 아홉시를 알리는 곳으로.
거기서 나는 낯익은 자를 만나
소리쳐서 그를 세웠다.
"스테츤 자네 밀라에 해전 때 나와 같은 배에 탔었지!
작년 뜰에 심은 시체에 싹이 트기 시작했나?
올해엔 꽃이 필까?
혹시 때 아닌 서리가 묘상(苗床)을 망쳤나?
오오 개를 멀리하게, 비록 놈이 인간의 친구이긴 해도
그렇잖으면 놈이 발톱으로 시체를 다시 페헤칠 걸세!
그대! 위선적인 독자여! 나와 같은 자 나의 형제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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