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귀농이다
충남 서천에 있는 국립생태원 실내 전시관 ‘에코리움’을 배경으로 하고 선 최재천 원장.
우리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 되는 데에는 몇번의 혁명적인 사건들이 있었다. 그중 제일 먼저 일어난 것이 바로 농업혁명이다. 거의 정확하게 1만년 전 지금의 중동 지역인 메소포타미아 평야에서 처음으로 농경이 시작되면서 급속도로 성장한 영장류가 우리 인류다. 우리 인류는 농경을 하기 전에는 다른 많은 영장류 동물들이 그렇듯이 수렵·채집 생활을 하는, 그다지 특별할 것 없는 동물이었다. 현생인류 호모사피엔스(Homo sapiens)가 이 지구에서 살아온 기간이 대충 25만년 정도인데, 그중 처음 24만년 동안은 인구 규모가 거의 변하지 않은 채로 저 아프리카 초원에서 사자나 하이에나를 피해 다니는 별 볼 일 없는 한 종의 영장류였다. 그러다가 농사를 지을 줄 알게 되면서 정착생활을 하며 그 수가 급격하게 증가한 것이다. 그런 다음 산업혁명과 정보혁명 등을 거치며 오늘에 이른다. 이처럼 우리 인간을 명실공히 ‘만물의 영장’으로 만들어준 일등공신이 농업이건만 18세기 말 영국을 중심으로 일어난 산업혁명은 인간 사회의 경제 구도를 송두리째 뒤바꿔 놓았다. 농업은 기술 혁신에 뒤처진 ‘어제의 산업’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제 또다시 인류는 결국 농업으로 되돌아올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2009년 내가 대표 저자로 펴낸 책 <상상 오디세이>에서 나는 21세기 우리 인류는 심각한 자원 고갈을 경험하게 될 것이며, 그중에서 우리의 생존을 위협할 가장 부족한 자원으로 FEW, 즉 식량(Food), 에너지(Energy), 물(Water)을 꼽았다. 석유 매장량이 줄어들며 에너지 문제는 일찌감치 예견된 일이었고, 농업용수와 공업용수는 둘째 치더라도 마실 물조차 부족한 지구촌 지역이 늘고 있다. 물과 에너지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심각할 줄 알았던 식량 문제가 최근 들어 어쩌면 가장 시급하게 인류를 옥죌지도 모른다는 예측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나 역시 오래 전부터 이 같은 자원 고갈의 문제에 대해 나름대로 연구해 왔지만 누구나 그랬듯이 물과 에너지 문제부터 걱정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어느 날 이 세 영어 단어의 순서를 뒤섞다 문득 ‘FEW’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거의 없다’ 혹은 ‘부족하다’라는 뜻을 지닌 영어 단어 말이다. 나는 지금 이 제목으로 책을 쓰고 있다. 우리나라 서점에 ‘FEW’라는 제목으로 책을 내놓아본들 금방 알아차릴 독자가 그리 많지 않을 수도 있을 것 같아 아예 영어로 쓰고 있다. 미국의 내 동료들은 제목이 매우 매력적이라며 격려를 아끼지 않고 있다. 나는 식량의 문제는 특히 우리나라에서 더욱 심각한 문제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식량의 해외의존도가 가장 높은 나라이기 때문이다. 쌀과 달걀을 빼곤 거의 모든 걸 해외에서 수입해 식탁에 올리는 나라가 아니던가? 우루과이라운드(UR)가 타결되며 출범한 세계무역기구(WTO) 체제가 올해로 20년을 맞는다. 아무리 자유무역 시대라 해도 식량은 공산품과 달리 자국민의 소비가 우선되도록 예외로 취급되므로 만에 하나 식량 문제가 심해지면 식량자급률이 낮은 나라들은 그야말로 최악의 사태를 맞게 된다. 막말로 석유가 고갈되면 석탄으로 되돌아가거나 심지어는 나무를 땔감으로 쓸 수도 있다. 그러나 식량은 물과 더불어 대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문제의 심각성이 그만큼 큰 것이다. 그래서 인류는 농경을 해온 지 1만년 만에 또다시 농업으로 되돌아올 수밖에 없게 됐다. 이것이 진정한 의미의 ‘귀농’이다. 얼마 전 세계 최고의 투자 전문가 조지 소로스가 우리나라를 찾아 서울대에서 특강을 하면서 학생들에게 할 수만 있다면 모두 농대로 진학하라는 충고를 거침없이 쏟아냈다. 예전에 우리 농촌에서는 쌀 팔고 소 팔아서 자식을 공부시켜 법대, 의대, 그리고 공대로 보냈다. 행여 농대로 진학한다고 하면 그야말로 지게 작대기로 흠씬 맞을 일이었다. 그러나 이제 도회지에서 자란 아이들이 농대로 몰려갈 참이다. 이에 내가 초대 원장으로 일하고 있는 국립생태원에도 특별히 ‘서천농업생태원’을 만들어 약용 또는 식용 식물을 경작해 경제가치를 창출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2013년 말 충남 서천에 문을 연 국립생태원은 환경 보전의 기초가 되는 학문인 생태학을 연구하는 기관으로서 그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교육과 전시도 제공한다. 아무리 추운 겨울이라도 최상의 볼거리를 제공하기 위해 만든 실내 전시관 에코리움(Ecorium)은 높이가 30미터가 넘는 거대한 돔 안에 세계 5대 기후대의 생태를 자연 그대로 재현해 놓았다. 이제 조만간 국립생태원에는 ‘국제개미연구전시박람회’가 열릴 것이다. 왕개미·짱구개미·가시개미 등 다양한 우리나라 개미는 물론 꿀단지개미·베짜기개미·잎꾼개미 등 국내에서는 볼 수 없는 열대 지방의 개미들도 전시할 예정이다. 특히 잎꾼개미는 아예 열대관 안에 설치해 관람객들이 바로 코앞에서 관찰할 수 있도록 마련할 것이다. ‘잎꾼’은 산에서 나무를 해오는 사람을 나무꾼이라고 부르니 잎을 물어 나르는 습성에 빗대어 내가 붙인 이름이다. 잎꾼개미는 중남미 열대우림에서 나무 이파리를 잘라 줄지어 집으로 가져와 그들을 잘게 썰어 죽처럼 만든 다음 그 위에다 버섯을 길러 먹는다. 잎꾼개미가 기르는 버섯의 유전자를 분석해보니 무려 5000만년 동안이나 잎꾼개미의 농장에서 길러졌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우리의 농경 역사가 기껏해야 1만년밖에 되지 않는 데 비하면 그들은 단연 지구 최초의 농사꾼이다. 금년에는 아무리 농사일이 바쁘더라도 꼭 짬을 내어 우리 국립생태원을 찾아 농사 선배들을 만나보시기를 바란다. 열대관 안에 실제로 잎꾼개미들이 나무 이파리를 잘라내는 것부터 10미터도 넘는 거리를 수백 마리의 일개미들이 제가끔 이파리를 입에 물고 나르는 모습과 그들이 지하에서 버섯을 경작하는 농장도 유리를 통해 들여다볼 수 있도록 전시할 예정이다. “21세기 새로운 농경의 시대를 맞으며 어떤 의미로는 우리보다 더 위대한 농사꾼인 잎꾼개미 전시에 이 글을 읽는 농민 여러분 모두를 초대합니다.” [출처] 농민신문/ 글 최재천/ 국립생태원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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