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업과학 선구자 벤 구리온
우리가 사막을 정복하지 않으면 사막이 우리를 정복하고 말 것이다.
‘네겝’은 ‘메마른, 남쪽’이라는 뜻이다. 한글 개역개정 성경에서는 네겝 외에 “네게브로 번역되고 있다. 이스라엘은 북부의 갈릴리호 주변을 제외한 전 국토는 남부의 네게브 사막이다. 사막 한가운데의 벤 구리온 유산연구소는 건국 영웅 벤 구리온 총리 부부의 묘소를 중심으로 이스라엘 리더십의 상징으로 우뚝섰다. 한반도의 10분의 1에 불과한 이스라엘 국토 면적에서 네게브 사막은 60%를 차지하지만 인구는 4%에 불과하다. 거의 비어 있는 땅이지만 이스라엘의 농촌 공동체인 키부츠에서벤 구리온의 필생의 꿈을 만날 수 있다.
1986년 제정 러시아 지배 하의 폴란드에서 태어난 벤 구리온은 10대 때부터 시온주의 청년 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했으며 18세에 바르샤바에서 결성된 사회주의 시온운동 단체에 가입했다. 스무살 되던 해인 1906년 그는 처음으로 이스라엘 땅을 밟았다. 이스라엘 건국의 꿈을 갖고 있던 벤 구리온이 처음 이스라엘 땅에서 시작한 일은 농촌 공동체 운동이었다. 벤 구리온은 여러 정치 운동에 참여해 1948년 이스라엘 독립 선언을 주도했으며 초대 총리 겸 국방장관에 올라 건국의 초석을 다졌다. 그는 건국 초기부터수자원 개발과 농촌 공동체를 개척하는 일에 힘을 쏟았으며 특히 네게브 사막에 키부츠를 건설하는 일에 박차를 가했다.
1953년 총리직에서 물러난 벤 구리온은 그의 신념대로 바로 네게브 사막 한 가운데 있는 스데 보커 키부츠로 들어가 농촌 공동체 운동을 벌였다. 그러나 그는 1955년 다시 총리에 선출돼 1963년까지 총리직을 수행했다. 그러나 그는 총리직에 있으면서도 주말에는 네게브의 스데 보커에서 지내면서 사막을 옥토로 가꾸는 일에 각별한 관심을 기울였다.
총리직에서 물러난 뒤에도 그는 정치활동과 네게브 개발 운동을 병행했으며 정계에서 완전히 물러난 1970년에는 스데 보커에 정착했으며 1973년에 이곳에서 일생을 마치고 이 곳에 묻혔다. 벤 구리온이 이스라엘 땅에서 처음 한 일도 키부츠 운동이었고 마지막까지 한 일도 사막을 개발하는 일이었다.
스데 보커 곳곳에는 벤 구리온의 발자취가 남아있다. 그가 머물던 집은 여느 공동체 내의 다른 집과 다름 없이 소박했다. 벤 구리온은 양을 직접 키우는 등 노동을마다하지 않았으며 그의 부인 파울라도 이 곳에서 세탁부로 일을 했다고 한다.
벤 구리온은 과학 기술을 통해 사막을 개발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벤 구리온기념관에 있는 그의 어록을 담은 석판에는 "네게브 사막은 이스라엘 과학 기술 능력의 시험장이 될 것이다"고 새겨져 있다. 벤 구리온의 과학 기술에 대한 신념은 베르셰바의 벤 구리온 대학을 통해 실현되고 있다. 벤 구리온 대학은 네게브 사막 개발에 필요한 기술을 제공해 왔으며 앞으로도 이 같은 역할을 계속할 것이다.
벤 구리온의 비전은 이스라엘의 나아갈 방향을 정확하게 제시했다. 이스라엘은쏟아져 들어오는 유대인 이민을 받아들이면서 영토 문제를 둘러싼 아랍 민족과 갈등을 피하기 위해서는 과학 기술 발전을 통한 황무지 개발이 유일한 해결책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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