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의 부름에 농부가 되어 떠난 모험
농민신문 : 2021-08-16
정희정씨(오른쪽)가 남편 박태빈씨와 함께 강원 화천 농장에서 수확한 꽈리고추를 들고 환하게 웃고 있다.경축순환농법 실현하기 위해 스물다섯살 나이에 농대 입학코로나 발생 후 대학 휴학하고 화천귀농학교 찾아 농사 배워반드시 올 것이라 기대하며 현재를 치열하게 살아가기로그를 처음 만난 것은 2년 전 학교 장독대 앞이었다. 나는 스물다섯살, 그는 스물여섯살로 새내기라고 하기엔 다소 늦은 나이에 농업대학에 입학했다. 나의 전공은 양돈학이고 그의 전공은 특용작물학이다. 학과 계열이 다르니 한학기가 지나도록 마주친 적이 없었다. 우리의 첫 만남을 떠올리면 지금도 웃음이 난다. 같은 학교였으면서도 인터넷을 통해 먼저 알았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를 하려면 내가 양돈학을 선택한 이유를 설명해야 한다.
‘육식을 위한 살생’과 ‘자연을 파괴하는 축산’은 나의 오랜 화두였다. 신념과 삶이 일치되는 것에 골똘했고 가축을 직접 키워보고 싶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똑똑하고 인간에게 유익한 돼지에게 매료됐다. 하지만 나는 농촌에 연고가 있기는커녕 돼지를 실제로 본 적도 없었다. 농업대학에 가기 전까지 단 한번도 서울 종로 밖을 나가본 적 없는 토종 도시여자였다. 나는 가축과 함께 살려면 농부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서울에서 정보를 얻을 방법은 인터넷을 쏘다니는 것뿐이었다. 그러다 어느 날 ‘경축순환농법’을 알게 됐다. ‘경종과 축산이 유기적으로 순환되는 농법’이라니. 작물과 가축, 무엇보다 땅을 되살린다는 것을 알고 내 인생의 방향을 정했다. “경축순환농법을 실현하는 유기농 농부가 되어야지.” 감히 그 길이 얼마나 지난할지 짐작도 못했다. 아무것도 모른다지만 연고도 없는 시골에 무작정 가는 것이 무모하다는 건 알았다. 그래서 농업대학에 지원했다.
학교에 입학한 후 돼지를 보러 견학 다니기 시작했다. 그 경험들이 무엇보다 소중해 돼지에 대한 내 생각과 견학일지들을 블로그에 올렸다. 그 시기에 다른 한편에서 나처럼 경축순환을 꿈꾸던 한 청년이 인터넷을 헤엄치다 우연히 내 블로그로 흘러 들어오게 되었다. “아니 내 신붓감이 여기에 있다니! 사진이랑 똑같으면 결혼해야지.” 나를 보고 한눈에 반했다고 고백했던 그다. 학교에서 유기농 농부가 되겠다거나 경축순환에 대해 이야기 나눌 친구를 만나기가 어려웠기에 우리는 서로 너무 귀하고 반가웠다. 그가 본능적으로 뱉었던 첫마디처럼 마침내 우리는 부부의 연까지 맺게 됐다. 그렇게 ‘너는 농사를 짓고 나는 돼지를 키우자’며 알콩달콩 꿈을 꿨다.
하지만 경축순환이 말처럼 쉬우면 다들 그렇게 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이제야 실감한다. 우리나라에서는 돼지를 방목해 경축순환을 하는 농장이 많지 않기에 정보도 귀했다. 어렵사리 유튜브에서 경축순환 농장을 인터뷰한 짤막한 영상을 찾았다. 우리는 수소문 끝에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까지 갔다. 방문했을 때는 여러 사정으로 돼지는 방을 비웠고 농장주는 영상에서 보던 것과는 세월이 많이 흐른 모습이었다. 하지만 일흔이 넘는 농부의 살아 있는 눈동자와 끝도 없이 펼쳐진 무밭, 그 가운데 지어진 축사를 보니 가슴이 일렁였다. 남편은 다음해 만만치 않은 농장주를 스승님으로 모셨다.
우리 학교는 2학년이 되면 1년 동안 전국의 농장으로 실습을 간다. 보통 이미 등록된 농장에 가는데 남편은 기어이 그 농장을 실습지로 신청해 간 것이다. 스승님은 비가 쏟아지는 날에도, 해가 뜨거운 날에도 자신의 제자인 남편을 끝까지 몰아붙이셨다. 네가 정한 농부의 길 무조건 성공하라며 당신의 모든 것을 쏟아부으셨다. 3월부터 11월까지의 대장정을 극기로 이겨낸 남편은 내가 우러러볼 만한 농부가 되어 돌아왔다.
그 시기에 나는 전남 곡성 동물복지형 흑돼지 농장에 있었다. 알뜰살뜰 아끼고 돈을 모아 돼지를 구입할 비용도 마련했다. 그러나 아프리카돼지열병(ASF)이 강원도를 휩쓸어 돼지와 함께 435㎞를 떠날 엄두가 나지 않았다. 나는 마음껏 돼지와 뒹굴어보기로 했다. 돼지가 옷에 똥칠하고 말썽을 부려도 행복했다. 농장까지 걸어 올라가는 발걸음은 언제나 즐겁고 뙤약볕에 풀을 베어 돼지에게 주는 일에 보람을 느꼈다. 수레에 돼지똥을 한가득 실어 나르면서도 세상의 어떤 직업보다 귀하고 가치 있는 일이라고 여겼다.
이것이 작년의 일이다. 서로 각자의 방식대로 실습을 마친 겨울, 도시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으로 혼란스러웠다. 대학 수업은 비대면으로 바뀌었고 우리는 휴학을 했다. 영농기반이 없는 우리에게는 학교에서 배울 수 있는 각종 실습수업이 꼭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둘이서 농사 한번 지어보자며 강원 화천으로 왔다. 이곳에는 화천현장귀농학교가 있다. 귀농학교는 남편이 대학 입학 전에 들러 농사를 지었던 고향 같은 곳이다. 올해는 농사팀장이라는 직책이 새로 생겨 남편에게 주어졌다. 나는 교육생으로 농사를 배우고 있는데 꽈리고추와 양배추가 주종목이다.
나는 3년차, 남편은 4년차 귀농생활 중이지만 완전한 독립을 이룬 농부가 아니므로 남의 집에 손을 빌려주러 갈 때가 있다. 그러면 열심히 일하다가도 언제까지 이렇게 해야 하나 서러운 마음이 든다. 그런 나를 보고 남편이 꼭 한마디 한다. 마음은 상하지만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수밖에 없다. 전국구로 농가 견학을 다니며 일을 돕고 철저한 영농준비를 할 수 있음에 감사하기로 한다.
우리가 꿈꾸는 경축순환 농장은 언제쯤 문을 열게 될지 모른다. 하지만 손을 맞잡고 있으면 단전에서부터 용기가 샘솟는다. 당장 우리 땅은 없지만, 매년 어느 땅에라도 농사를 짓고 있다. 돼지는 키울 수 없지만 닭장에 가득한 병아리를 보면 마음이 풍족하다. 문을 열면 아름다운 풍경과 넘쳐나는 텃밭의 먹거리들. 우리에게 농부의 길을 포기하지 말라고 세상이 격려하는 걸 느낀다.
우리는 올 9월에 결혼식을 올리기로 했다. 나는 우리의 만남이 더욱 소중한 건 무모한 길을 함께 가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경축순환농법을 통해 땅을 되살리고, 그 농장이 귀감이 되고 우리가 생산한 농산물이 옳은 가치의 기준이 되도록 노력할 것이다.
치열하게 살다보면 어느새 청년의 나는 가고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서로 늙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당신 농부 다 됐네. 당신 같은 농부가 있어서 다행이다”라고 말해주고 싶다. 도시에서 자란 우리가 땅의 부름에 농부가 되어 모험을 떠나왔다. 그 모험이 빨리 가지 않아도 되는, 멀리까지 웃으며 가야 할 길이기에 서로에게 짝꿍까지 붙여주었다. 만약 내가 혼자였다면 화천까지 오지 못했을 것이다. 올여름은 여기서 고추와 양배추를 키우고 있지만 남편과 함께라면 어디서든 또 농사를 짓고 있을 것이다. 그러다보면 꿈꾸던 우리의 경축순환 농장에서 김을 매고 있으리라 믿는다.
우리는 함께이기에 땅의 부름에 기쁨으로 응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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